부여 반교마을, 멈춘 시간의 문을 열어보다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복잡한 도심의 빌딩 숲을 벗어나 훌쩍 떠나온 충청남도 부여군 반교마을에서의 여정은 마치 잊혀진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 같았습니다. 현대의 익숙한 풍경이 서서히 옅어지고 굽어진 길섶이 나타나는 순간, 저는 이 특별한 기행문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낯선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의 묘한 떨림을 느꼈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자동차의 날카로운 매연 대신 촉촉하게 젖은 흙내음과 짙은 풀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귓가를 때리던 일상의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습니다. 주변의 공기마저 한층 차분하고 서늘해지며 저를 맞이했습니다.


마을을 조용히 감싸 안은 안개가 옅게 드리운 굽어진 길모퉁이는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경계이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물리적 문턱 같았습니다. 그 신비로운 틈새를 한 걸음 내디디며 시간의 문을 넘어서자, 시계바늘이 바깥세상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흐르는 투박하고도 아름다운 과거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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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굽어진 길을 따라 묵묵히 세월을 이고 선 돌담과 가로수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낡은 기록의 냄새가 났습니다. 크고 작은 호박돌과 막돌이 흙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선을 그려내는 전통 돌담 곁을 걷노라니, 어느새 조선시대의 어느 평화로운 산골 마을로 온전히 타임슬립한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소박한 초가 지붕과 곧게 뻗은 가로수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숨을 멎게 할 만큼 고요합니다. 귓가에는 옛사람들이 나무 기둥을 세우고 돌을 얹으며 묵묵히 담장을 쌓아 올리던 정겨운 숨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만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과거 이곳에 널빤지로 만든 다리가 있어 우리말로 '널따리', 한자로는 '반교(盤橋)'라 불렸다는 이 마을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박물관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허물어지던 담장을 전통 방식으로 직접 복원해 문화재로 지정된 옛 담장에는 옛것을 지키려는 귀한 노력이 켜켜이 배어 있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이곳의 고즈넉한 정취에 매료되어 '쉬고 또 쉰다'는 뜻의 휴휴당(休休堂)을 짓고 머물렀던 이유도, 바로 이 돌담길이 품고 있는 다정하고도 묵직한 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화려한 치장 하나 없이도 지친 마음 깊은 곳에 위로를 건네는 투박한 돌담에 가만히 손을 얹어봅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돌 위로 전해지는 단단하고 서늘한 감촉은 바쁘게만 살아왔던 저에게 잊고 지냈던 내면의 평온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옛사람들의 따뜻한 숨결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느덧 짧았던 과거로의 여정을 마치고 마을 길을 되짚어 나오며, 다시 일상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문을 조용히 닫았습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을 때 내 스마트 워치의 시간은 변함없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의 시간은 그 고즈넉한 돌담길에 잠시 머문 듯 조금 더 깊어지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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