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물결, 의림지 위로 시간의 문이 열릴 때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가을이 깊어지다 못해 스스로를 비워내기 시작하는 계절, 충북 제천의 의림지를 찾았습니다. 화려한 단풍의 잔상이 사라진 그곳엔 오직 고요한 수면과 차가운 공기만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든 '텅 빈 시간'. 그 적막 속에서 나는 박제된 풍경이 아닌,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거대한 역사의 맥박이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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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의림지의 전경]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본 의림지는 색채를 덜어내자 비로소 그 본연의 골격이 드러났습니다.

이곳은 2,000년 전 삼한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합니다. 강산이 수백번 변하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이 물길에 의지해 삶을 일구었겠지요. 층층이 쌓인 세월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을까요?

면면히 이어져 온 저수지의 물결을 보고 있으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지금 내 발밑을 적시는 이 기운 또한 천 년 전 누군가가 느꼈던 바로 그 서늘함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텅 빈 가을의 의림지 어딘가에는, 분명히 천년의 문을 열어줄 '시간의 문'이 있을 것만 같다고. 그 문은 화려한 열쇠로 여는 것이 아니라, 소란스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고요히 수면을 응시할 때 비로소 그 형태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000년의 시간을 묵묵히 버텨온 물결이 나에게 말을 건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듯 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 어느 새 천년 전의 어느 고요한 순간에 이르러 있습니다.


일상의 소음을 뒤로하고 의림지를 마주하면 마주칠지 모르는 시간의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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