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연산역 급수탑, 1911년으로 향하는 시간의 문

시간의 문을 찾아

by Black and Navy

일상의 균열을 마주한 낯선 설렘 평범한 주말 오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역 급수탑을 찾는 기행문을 쓰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한적한 철길 옆 고즈넉한 풍경 속을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일상의 번잡한 소음은 아득히 멀어지고, 서늘한 바람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붉은 벽돌이나 콘크리트가 아닌,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 기둥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거대한 구조물 앞에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낡은 우물터 곁에서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파동치며 흔들리더니, 1911년의 낯선 공기로 이어지는 시간 여행의 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문을 넘어 마주한 묵직한 시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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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끝없이 뻗어 올라간 낡은 사다리를 따라 시선을 던지면, 하늘을 찌를 듯 압도적인 규모의 건축물이 뿜어내는 웅장함에 잠시 숨이 멎는 듯합니다. 하부의 단단한 화강석 기둥 위로 얇은 철판을 둥글게 감아 리벳으로 촘촘히 조립한 상부 물탱크가 눈에 들어옵니다. 차가운 금속과 거친 돌의 질감 위로 내려앉은 빈티지한 세피아빛 햇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곳의 시계바늘은 바깥세상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습니다.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턱을 완전히 넘어서자, 멈춰 있던 철로 위로 거친 숨을 내뱉는 증기기관차의 우렁찬 기적 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립니다. 매캐한 석탄 냄새와 함께 뜨거운 하얀 수증기가 사방으로 피어오르고, 당장이라도 기차에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거친 호흡과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1911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세워져 대한민국 현존 최고령 급수탑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 거대한 탑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약 60여 년간 쉼 없이 물을 토해냈습니다. 과거의 환영 속에서 30톤의 물을 가득 품고 호남선 열차들의 목마름을 달래주던 그 힘찬 심장 박동이 다시금 세차게 뛰는 것을 느낍니다. 누군가의 설레는 만남과 아쉬운 이별, 그리고 고단한 애환을 묵묵히 내려다보았을 이 탑은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 한 시대의 척박한 갈증을 해소해주던 거대한 안식처였음을 온 감각으로 실감하게 됩니다.


문을 닫으며 남겨진 짙은 잔상 환상처럼 귓가를 맴돌던 기적 소리가 서서히 흩어지고, 다시금 고요하고 차분한 현실의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갑니다. 눈을 뜨니 매캐했던 석탄 향기 대신 맑고 서늘한 흙내음만이 코끝을 맴돌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증기기관차가 영원히 멈춰버린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급수탑의 모습은 묘한 쓸쓸함과 함께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웅장한 자태 뒤에 숨겨진 근대 산업 유산의 묵직한 존재감이 가슴 한편에 길고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을 닫고 다시 현실의 철길로 걸어 나왔을 때, 시간은 변함없이 일상의 속도로 흐르고 있었지만 마음속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아득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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