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1,400년 전 백제의 숨결로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충청남도 부여의 고요한 도심 한복판, 일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드는 경계가 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을 지키던 부여 정림사지는 현대의 속도감에서 벗어나 찬란했던 고대 왕국으로 진입하는 가장 완벽한 시간 여행의 통로입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기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백제가 남긴 숭고한 침묵 앞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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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의 대비 속에 드러나는 백제의 단아한 미학

광활한 절터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마주하면, 화려한 색채보다 강렬한 무채색의 위엄에 압도됩니다.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석탑의 실루엣은 하늘의 역동적인 구름과 대비되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뿜어냅니다. 좁고 높은 비례가 아닌, 낮고 넓게 퍼지는 지붕돌의 곡선은 백제 특유의 절제미와 우아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시간은 바깥보다 훨씬 느리게 흐릅니다. 1,4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뎌낸 거친 돌의 질감은 차가운 석조물이라기보다, 당시 사람들의 온기가 서린 기록물처럼 다가옵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듯 섬세한 기단부와 기둥의 배흘림 기법을 보고 있으면, 이 문 너머에 존재했을 화려한 사찰의 전경이 눈앞에 환영처럼 펼쳐집니다.


비워냄으로써 채워지는 역사의 본질

석탑의 몸돌에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평제문(平濟文)은 멸망한 왕국의 아픔을 증언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석탑의 존재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터만 남은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영원한지를 자문하게 됩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색은 휘발되었지만, 견고한 비례와 균형이라는 본질은 시대를 관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침묵 속에 홀로 서 있는 석탑의 그림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장 정직한 이정표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문턱에서

정림사지의 너른 마당을 뒤로하고 다시 복잡한 거리로 나설 때, 발걸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신중해집니다. 문을 닫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내 시계의 바늘은 여전했지만, 마음속에 담긴 백제의 시간은 조금 더 깊고 단단해진 느낌입니다. 사라진 것들이 남긴 여운은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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