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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Sep 15. 2016

경계에 선 청춘의 보고

한국과 호주 사이에서 주사위를 던지다

  여행과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호주에 1년 넘게 체류한 나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자가 1년 정도 더 남아있다. 이후에는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는 이상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물론 비자를 연장할 수 있겠지만 신중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으로 남을 수도 있고,  혹은 나를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서 지원을 받아내면 된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상, 삶을 내던져야 하는 간절함이 필수다. 무엇하나 쉽사리 이뤄지는 건 없다. 학생비자로 연장을 하더라도 어차피 정규과정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스폰서를 자청할 회사를 찾아내지 못하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나라에 부족한 기술 인력이 되어 기술이민 기준을 통과하면 된다. 이십 대 전체를 문학과 예술에, 혹 망상과 몽상에 사로잡혀있던 나로선 버거운 일이다. 어느 나라건 무궁무진한 비자 방식이 있지만 그러한 예외적인 비자는 나와는 먼 이야기다. 그렇다면 방법은 몇 줄로 다시 요약할 수 있다. 이 나라가 원하는 일꾼이 되어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나의 길을 모색해보거나.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속 편히 결정할 수가 없다. 한국이 싫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는 도박꾼의 기질을 가졌는데, 자신의 죽는 날짜를 정확하게 예언하곤 그 날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삶을 하나의 게임이라 여긴 게 분명하다. 삶은 주사위 놀이가 아닌데, 그럼에도 내가 던지는 주사위는 자꾸만 황금열쇠를 비켜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주사위 두 개가 똑같은 숫자가 나와야지만 탈출할 수 있는 무인도에 갇혀 버린 것 같다. 남들은 호텔을 산다는데, 빌딩을 산다는데, 나는 아직 건물 구입은커녕 $600를 매달 월세로 지불하고 있다. 나는 어딘가에 갇혀 두 개의 주사위에 같은 숫자가 나올 확률을 손바닥 위에 그려보고 있다. 카르다노처럼  손금이라도 봐야 하나. 운이 좋아 무인도를 빠져나가 봤자 갈 곳은 없다. 던지지도 못한 주사위는 내 손에 있다. 주사위는 돌덩이처럼 자꾸 무거워져만 간다. 뱃살은 늘어지고, 무릎은 닳고, 우울은 노을처럼 창문을 넘어 온몸을 붉게 물들인다. 판을 엎어버리고 그저 낮잠이나 자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런 게임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렸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유민 씨는 8년 전, 한국을 떠나와서 호주에 정착을 했다. 자동차 정비사라는 꿈을 안고 학교에 들어가서 졸업을 하고, 포드 회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지원해주는 비자로 영주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곤, 곧장 시민권을 신청했다. 이 모든 일은 5년여 만에 이뤄져 버렸다. 그는 한국에 가려면 관광비자로 입국을 해야 했는데,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한국 여권에는 ‘VOID’라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종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어, 할 일 없으면 직업이라도 구하러 가시죠.”     

  나와 동갑내기인 유민 씨는 원반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발목이 삐어 몇 주 일을 쉬고 있던 터였다. 그는 학생 때부터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했다. 얼음운반, 설거지, 바텐더, 고기공장, 청소, 서빙 등.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한국인이 호주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고용주나 고용자의 입장에서도 한계를 미리 정해버리고 직업군을 설정하기 마련이었다. 나 역시도 이곳에서 한 일이라고는 설거지와 농작물 패킹 등이 전부니까. 유민 씨는 이력서 쓰는 걸 도와주었고, 우리는 함께 일을 구하러 다니기로 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직접 이력서를 들고 직업을 구하는 일꾼들이 많았다. 운이 좋아 인사담당자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면접을 보고, 또 채용이 되기까지 했다. 어차피 주사위는 내 손안에 있고, 나는 나아가야만 했다. 날카로운 초침에 등이 찔리기 전,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멜버른 근교에 있는 가구공장의 접수처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처럼 직업을 구하러 온 사람들인 듯했다. 경쟁자일지도 모르는 우리는 서로의 발끝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담당자가 나타난 것은 삼십 여분이 지나서였다.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검은 뿔테를 낀 그는 브라이언이라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이력서를 한 장씩 훑어보더니 그 자리에서 면접을 보았다. 유민 씨가 첫 번째였다. 호주에서의 오랜 경력자답게, 아니 이젠 호주 사람이 되어버린 그는 매끄러운 인터뷰를 진행했고, 브라이언 역시 만족한 듯 이력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세 번째가 나의 차례였다. 말하는 거나 쓰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나도 영어를 잘 못했다. 나는 수화에 가깝도록 손짓을 해가며 나를 설명했다. 이력서에 재밌는 게 보였던 지, 그가 나에 대한 흥미를 가졌다. ‘September 2011 – September 2012 KBS1(Korean Broadcasting System), Busan, Korea, -Television: Host of a show' 나는 4년 전, 부산 KBS1에서 ’ 바다 에세이 포구‘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KBS가 무엇인지 모를게 분명하기에 괄호에 친절히 설명도 해두었던 이 이력을 기어코 걸고넘어진 것이다. 도무지 가구공장과는 상관없는 이력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나를 밝히지 않으면 나의 이십 대가 백지처럼 가벼운 종이 한 장이 되어 버릴까 봐 노심초사 한 줄을 끼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의 쇼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호주에는 왜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이러쿵저러쿵 대충 대답을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집요했다. 나의 비자 상태를 확인한 이후, 비자가 끝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음, 음,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건 한국어와 영어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호주와 한국에 관한 질문이 아닌, 무인도에서 이제 막 나가야만 하는, 한 청년, 아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에선 이방인을 향한 냉철한 물음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의 전공을 물어보았다. 문학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무엇인가요? 그가 말했다. 그건 무엇일까요? 나는 되묻고 싶었지만, 그저 시와 소설과 연극을 공부하고 쓰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구공장의 워크숍 매니저였고, 나는 시와 소설과 연극을 공부하고 쓰던 문학도였고, 우린 그렇게 하늘이 높은 1월의 어느 날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말을 했다. 그게 다였다. 브라이언이 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면접은 끝이 났다. 

  한 여름의 열기로 푹푹 찌는 1월의 어느 일요일, 침대에서 일어나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는 틈에 손바닥에서 주사위가 떨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사위는 33, 같은 숫자 두 개를 가리켰다. 무인도에서 나올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집값을 내고 남은 돈으로는 기타 엠프를 사기로 결심했다. 노래라도 불러야 살아지지 않겠는가. 오늘의 할 일은 목이 쉬어라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는 것이다. 물론 브라이언의 전화를 기다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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