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오션 로드 (Great Ocean Rd)
J와 나는 호주의 남동부 Maffra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났다. 우리는 농장에서 함께 일을 했고,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나보다 6살이 어린 J는 대학교 4학년의 절반을 남겨둔 채 휴학을 한 취준생이었다. 그 마을의 중심 거리에는 식당, 상점, 그리고 작은 카페와 빵집이 있었다. 나는 그 길지 않은 거리를 느긋하게 걷는 걸 좋아했는데, 장을 보거나 산책을 가거나 조깅을 할 때, J는 자주 동행했다. 우리는 타지에서 지내는 고충과 취업에 대한 불안, 자신의 성격에 대한 불만과 그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등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내 둘이서 하는 이야기야 결국에는 한 곳으로 빠지기 마련이었다. 바로 연애 문제였다. J는 농장에서 만난 동갑내기에게 빠져버려 한동안 마음을 앓고 있던 터였다. J의 고충 중 하나는 그 애 앞에만 서면, 하고 싶었던 말은 입 안에서 녹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J는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혹은 안부를 묻거나 식사에 초대를 하거나 하는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J의 수줍은 미소는 노을이 내려앉은 마을의 길목에서 더없이 빛나 보였다.
J는 마침내 고백의 장소를 스스로 지정했다. 그곳이 바로 그레이트 오션 로드, 그 찬란한 이름의 종착지에서 숨겨왔던 마음을 내놓기로 한 것이었다. 농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했던 친구들, J와 그녀,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서 한 차에 합승했다. 나는 종종 룸미러로 그 애의 옆에 앉은 J를 힐끗힐끗 보았다. J는 창밖만 바라볼 뿐, 다른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사실 약 300km 길이의 이 해안 길은 침식작용으로 구불구불한 만과 절벽이 호화롭게 형성되어 어디에 서건 그곳이 종착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줄곧 J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고백을 할 것인가. 모른 척 눈감아 주기에 나는 이미 J의 감정을 제법 공유하고 있었다. 몇 백 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드라마의 주제가 사랑인 탓은 늘 처음 있는 일처럼 흥미롭기 때문이었다.
침식작용으로 생겨난 바위기둥인 열두 사도(Twelve Apostles)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해안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그녀가 싸온 김밥을 나눠먹었다. J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도 않고, 김밥을 우걱우걱 씹어 먹기만 할 뿐이었다. 12라는 숫자는 시간의 순환으로도, 혹은 종교적으로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12개의 바위기둥은 이미 파도에 깎여 8개 정도만이 확실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2000만 년 전에 생긴 이 바위기둥은 지금도 1년에 2cm씩 침식되어 훗날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훗날이라는 단어는 막연하지만 지구는 돌고,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니, 어쨌든 침식을 막을 도리란 없을 테다. 물론 또 다른 해안가에 절벽이 깎여 새로운 바위기둥이 생길 것이다. 부서지고, 혹은 다시 생겨나고. 도대체 삶은 어떤 형태로 나아가는 것일까. 나른한 햇살이 절벽 끝에서 다사롭게 빛났고, 나는 빛의 길을 따라 걸었다. 모래에 발이 움푹 들어갔고, 그곳에 나의 발자국이 생겨났다. 이 자그마한 흔적이 나의 무게, 내 존재의 무게인 거 같아 공허해졌다. 나는 모래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J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게 보였다.
J는 몇 번이나 그녀의 등을 두드리려 애썼다. 나는 그의 떨리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흔들리는 촛불처럼 연약해 보였다. 제 마음의 확신에 대한 문제가 아닌, 상대의 마음을 몰라 생기는 불안이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촛불은 초를 녹이며 뜨겁게 타오르지 않던가. 하지만 J는 끝끝내 다가가지 못했고, 그 애 앞에 서지 못했다. J는 방향을 틀어 몰아치는 파도를 향해 달려 나갔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열병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는 탓이었다. 나는 J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들 그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숨을 헉헉대던 J가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건 그녀의 이름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한탄하는 질책이었을까, 나는 모르겠다. 바위에 부서지던 파도는 J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J는 왜 이토록 먼 타지까지 와선 돌아오지 않는 마음의 메아리를 기다리는 것일까. 급기야 J는 웃통을 벗어던지더니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파도는 J의 몸을 싣고 둥실둥실 두둥실, 그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가만 놓아두었다. 이미 젖어버린 마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저 볕에 말린다고 될 문제도 아닌 것이다. J는 한동안 이리저리 휩쓸려갔다. 나는 휩쓸려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쳤다. 방향을 잃은 J의 고백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바람에 실린 그의 고백이 나를 조금씩 침식시키고 있었다.
실은, 더없이 답답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마음이었다. 타국에서의 생활 동안 응어리처럼 단단해져 무겁기까지 한 내 마음이 버거워져 버린 것이다. 심장을 꺼내어 만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얼마나 굳어버린 걸까. 하지만 제아무리 견고한 바위라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부서져 내리고야 만다. 바람은 단단함을 갈아내고, 빗물이 굳어버린 것들을 무너뜨린다. 비단 바위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고, 흙은 먼지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먼지는 모여 모래가 되거나 바위가 되거나 하나의 별이 된다. 그리곤 또다시 억겁의 세월 속에서 별은 제 몸을 태워 빛을 낸다.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내지만, 어디에도 별의 그림자는 없다. 문득 서글프다. 어쩌면 어떻게라도 고백을 해보려 하는 J의 용기가 부러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이 계절의 어디 즈음 서 있는지 좀처럼 짐작 가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바위를 향해 달려드는 파도가 무서웠고, 겁을 내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냥 자책하거나 혹은 위안하거나 할 수 없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어느 세계로도 편입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서 J의 확고한 감정의 발견은 입 안에서 웅얼거리며 나오지 않는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순수한 에너지여서 나는 그게 그렇게나 그리웠던 것이다.
J의 고백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파도에 부서져버린 것일까. 하지만 분명 다른 곳에서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크게 숨을 쉬었다가 내뱉었다. J가 어느샌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나는 바닷물에 젖은 J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잠시 동안 우린 그곳의 일부가 되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광활한 바다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