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에 말 할 수 있는 것들 1
재희의 이야기_남자 퇴치법
사람들은 팔을 힘차게 흔들며 호수 주위를 산책하고 있다. 오후의 가을 햇살은 세상에 세피아 필터를 씌운 것 같다. 카페 바깥과 안은 향기만 다를 뿐 똑같이 여유 있었다. 얇은 황금색 크레마가 커피 맛을 더 시큼하게 했다. 커피 좀 안다는 지원은 드립 커피로 주문했고 재희와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뜨거울 때 마시지 말고 천천히 식혀가며 마셔. 향미가 변하는 게 느껴질 거야.”
“오! 바리스타 시험에서 1등 먹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재희와 나는 커피잔을 코 가까이 가져가며 향을 맡았다.
“사과향과 티로즈향이 나지 않아? 물론 사람마다 향이 다르겠지만.” 지원도 커피잔을 들며 말한다. 오늘의 커피 에티오피아 게샤빌리지 오마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에겐 그냥 신맛과 쓴맛이 나는 커피다.
“벌써 우리 내년이면 오십이다.” 재희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마흔아홉, 오십이 완성되기 전의 수. 어디에서 읽었는데 구는 불완전한 수, 십은 완성되는 수라고 하더라.” 내가 말했다.
“오십이 되면 또 다른 재미가 있겠지?” 인생 끝난 듯한 시무룩함으로 지원이 말했다.
“그래. 사십을 완성 시켰듯이 오십도 그렇게 오는 거지. 우리 사십이 되면 인생 끝나는 줄 알았잖아.” 커피 한 모금을 문 채 내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네 번을 완성했네.” 지원의 표정이 씁쓸했다.
우리는 커피잔을 들고 카페 밖 통창을 바라보았다. 완성이라. 그동안 무엇을 완성했을까? 완성은 각각의 인생 마디에 완결 지은 것이 있다는 건데 완결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간 후라 커다란 나무 밑에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나뭇잎을 그렇게나 많이 떨구고도 아직 푸릇한 나뭇잎이 나무에 가득했다. 마흔아홉의 우리도 나무와 같다. 어제까지의 시간은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이고 앞으로 우리가 채워야 할 시간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이다. 떨어진 나뭇잎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나뭇잎은 태양에서 8시간 전에 출발한 빛을 향해 맹렬하게 빛을 받아 나무의 뿌리와 가지, 줄기를 우람하게 키우고는 빛을 다했다. 나무가 나뭇잎을 떨구듯 우리는 지난 시간의 나뭇잎을 떨구기도 붙잡기도 하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벌써 가을이다. 하루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시간 정말 빠르다’라는 거야.” 지원의 말에 재희와 나는 공감의 고갯짓을 보냈다.
“일단 먼저 아홉수를 잘 보내야 해. 아직 3개월이 남았는데 지금까지 잘 버텼잖아.” 재희는 뭐가 재미있는지 싱글거리며 말했다.
“너 뭔일 있었구나?” 궁금증으로 나는 재촉했다.
“너 요즘 음악치료사 공부한다더니 뭔데?” 지원도 재희를 빤히 쳐다봤다.
“맞아. 나 요즘 음악치료 공부하고 있어.”
재희는 음반도 낸 어엿한 가수다. 작은 소극장에서 그녀의 재즈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재즈 피아노의 선율에 맞춰 냇 킹 콜의 러브를 부르던 재희는 그녀를 돋보이게 했던 반짝이 드레스보다 더 빛났다.
가수는 그녀의 번외 직업이었다. 일 년 전 본업이 되지 못하는 음악을 본업보다 더 열심히 했던 그녀가 본업에서 빠졌다. 보컬 지도와 일주일에 하루는 장애인 합창단 수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간혹 들어오는 공연에서 가수가 되기도 한다. 퇴사 후 그녀는 음악치료사가 되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아홉수를 어떻게 잘 보내고 있는데?” 지원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재희를 재촉했다. 재희는 식어서 신맛이 더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재희는 그날 강의실에서 음악치료기술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한참 강의가 지루해질 무렵 옆에 있던 사람이 재희를 툭툭 쳤다. 재희보다 다섯 살 이상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파마로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한 손에 볼펜을 든 채 재희를 쳐다봤다.
“저...조금 전 교수님이 사례로 들어주신 음악이 뭐였죠? 제가 잘 못 들어서...”
남자는 수줍은 듯 재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흐의 인벤션 7번이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은 피피티를 넘기며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음악이 좋은 이유를 들고 있었다. 치료 중 사용하는 음악의 사례를 간간이 곁들이며.
‘저런 음악을 매일 들으며 생활한다면 내 머리도 맑아지겠다.’ 재희는 필기를 하며 강의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재희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강의실에서 마주친 후 두 번째 전화였다. 전화번호를 준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궁금했다.
“저녁 드셨어요?” 남자가 물었다.
“아뇨. 지금 저녁 준비하고 있어요.”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럼 같이 저녁 드실래요?” 물었다.
가끔 남자들은 재희를 보고 오해했다. 무대에서 노래하고, 군살 없는 작은 몸을 가진 그녀가 혼자일 거라 단정했다.
“왜 저랑 저녁 먹고 싶어요?” 재희는 직접적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거 알고 계시죠?” 남자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재희는 어이가 없었다. 몇 번 봤다고 좋아한다는 건지. 그렇지만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은 그녀는 침착하게 남자에게 말했다.
“자, 자 그럴 수 있어요.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이해합니다.
자, 우리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지금 외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당신은 나를 좋아하는 것 처럼 느끼는데 그건 그냥 외로움이예요. 외로우니까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싶은거죠. 그 외로움이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거죠.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걸까요?
자 이제 당신의 깊은 내면을 다시 들여 다 보세요. 당신은 지금 여자와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가 필요한 거예요.”
재희의 얘기에 지원과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재희는 개그 담당다웠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어디로 튈지 모른다.
“너 그 연하남이 강의실에서 물어볼 때 재희 너 웃었지?”
“글쎄. 아마 그랬겠지?” 내 물음에 재희가 대답했다.
“남자는 여자가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한다잖아. 아마 그 남자 너가 웃었을 때 가족 계획까지 세웠을 거야.” 내 말에 지원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야!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지. 남자가 웃어봐. 아! 이 남자 나한테 관심 있나 봐. 이런 생각 안 할 여자가 있을까?” 재희가 말했다.
“맞아. 나도 남자가 웃어주면 바로 키스를 꿈꿔.” 나도 계속 웃으며 말했다.
“어쨌건 재희의 말은 남자 퇴치하기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정.” 비장하게 지원이 마무리했다.
“맞아. 나도 꼭 써먹어 봐야겠어. 그런데 써먹을 수 있을까? 제발 써먹고 싶다.” 간절한 듯 두 손을 모으며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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