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과 책 반납의 어려움의 상관관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반납일이 다가왔고, 반납을 해야 했지만 귀찮았다. 도서관은 중랑천을 따라가다 보면 2km 지점쯤 있는 곳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싫었다. 왜 이리 귀찮은지...
반납일을 넘겼다. 하지만 계속해서 반납은 미뤄졌다. 점점 더 가기 싫어졌다. 그렇게 3주가 지났고, 마음 한편은 반납해야 하는데 하는 작은 속삭임만 남고 잊혔다.
어느 날, 친한 동생이 자전거를 타고 인천을 가자고 했다. 지난번 부산으로 자전거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수락했다. 당장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 약속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탔다. 봄날의 따사로운 바람과 햇살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가던 중 도서관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책을 반납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났다. 이왕 오는 길에 책을 가져올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대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이렇게 왕복 120km를 달렸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난 왜 고작 2km밖에 있는 도서관은 자전거를 타고 가기 귀찮아하면서 주말엔 120km를 밟았단 말인가.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일과 놀이의 차이는 수단과 목적이 어떠하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일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있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책을 반납하는 것은 일이었다. 책 반납이 목적이고, 그곳까지 가는 것이 수단이었다. 수단에 목적이 동반되어 있지 않다 보니 그 수단은 고통의 작업이 된다. 반면 자전거 여행은 수단과 목적이 같다. 자전거 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전거 타는 것에 흠뻑 빠져 있을 수 있었다.
곰곰이 내 일상을 돌아보니 일은 일처럼 놀이도 일처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겨지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은 왠지 책을 완독 하기 위해 읽는 것 같았다. 넥플릿스를 보는 것은 해야 할 일을 잠시 미루기 위해 보고 있었다. 요리는 먹기 위해 했고, 설거지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해야 했다.
현재를 살라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한 삶을 말한다. 수단과 목적이 따로 있다면 수단은 고통이 되기 쉽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공부하는 행동은 수단이 된다. 매일을 손에 잡히지도 않은 대학을 생각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공부를 계속한다.
어쩌다 공부가 즐거울 때가 있다. 알아가는 맛에 빠져 있을 때이다. 이 때는 내가 얼마나 문제를 맞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공부했느냐 또한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 자체가 좋다.
내가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려고 할 때 반납을 위해 자전거를 타려 하니 그것이 고통이 된다. 그래서 귀찮고 하기 싫어진 것이다. 내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것, 책을 가방에 넣는 것,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는 것,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면 나는 3주 넘게 책 반납을 미루지 않았을 것이며 그 자체를 즐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