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지 않기 위해서..
회사를 이용하고 싶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조용한 사직 (quiet quitting)을 실천하고 있다.
직장 생활을 굳이 접을 이유도 없지만 내가 대리, 과장 때 일이 인생의 전부인 양, 동료가 나의 가족인 양, 회사가 내가 영원히 소속될 조직인 양.. 그렇게 폭 빠진 직장 생활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직장을 다니지 않는 나를 아직 상상하지 못한다.
조직에서 한풀 꺾여버렸지만 회사를 박차고 나갈 패기가 있지도 않다.
퇴사 이후에 내 사업을 의욕적으로 펼칠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다.
회사에서 나는 그저 나간다고 하면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럭저럭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이고 회사에 나름 기여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사는 가면 갈수록 나를 쓰고 버리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가 나를 이용하는 만큼, 나도 역으로 회사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회사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서 나를 고용하고 사용하는 동안 나도 회사를 월급 외에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하고 싶었다.
그래야 뭔가 좀 덜 억울할 것 같았고 계속 출근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동하기 위해서 출근합니다.
내 주변에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 특히 잃어버리는 것이 건강이다.
잦은 야근, 업무와 사람 스트레스, 불규칙한 식사..
임원이나 CEO 레벨쯤 되면 피트니스도 다니고 골프도 열심히 연습하고 하긴 하더라만, 깨알 같은 실무레벨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건강을 돌볼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어쨌든 언젠가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끝나는 것이 회사 생활이다.
조직에 몸 바쳐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냈던 사람일수록 퇴사 이후에 더더욱 심한 공허함과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누구나 40대 이후에는 여기저기 몸에 문제가 또 생기기 마련인데.. 서글프게도 그때쯤 회사에서도 내리막길을 만나게 된다. 30대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쓸쓸한 내리막을 다 내려오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돌보지 못한 몸과 공허한 마음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회사와 내가 이별했을 때 회사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소중한 건강을 회사 때문에 잃어버린 것만 같은 회한도 갖기 싫었다. 회사가 나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도 미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의 전환을 하기로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월급값은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운동을 목적으로 출근한다. 출근하는 이유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라고 나의 출근 이유와 회사 생활의 목적을 다시 세웠다.
점심시간의 의미와 운동을 못 갈 만 가지 이유
과거의 내게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이란 동료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점심시간은 괴로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함께 밥 먹기를 피하고 싶은 동료도 생겨나고, 나이 많은 차장급 실무자가 여전히 생기 있고 희망 있고 의욕에 넘치는 후배 사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어울리기엔 에너지의 레벨과 관심사가 너무 달랐다.
그래서 점심시간의 의미도 다시 정의했다.
'점심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혼자 사용하는 시간이다.
운동을 가든, 혹은 가지 않는 날도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겠다. '라고.
회사 옆 필라테스 샵 점심시간 타임을 등록했다.
처음엔 혼자 쭈뻣쭈뻣 일어나 나가야 된다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특히 팀장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할 때는 좀 곤욕스러웠다.
일로 스트레스받는 날엔 운동이고 뭐고 다 귀찮아서 하고 싶지 않았다.
필라테스 샵에서 운동복을 갈아입는 시간, 마치고 다시 일상복으로 환복 하는 시간.. 등등
귀찮고 번거로운 것도 많았다.
정작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려니, 운동을 못 갈 이유가 만 가지나 있더라는 얘기다.
그럴 때마다 내가 회사에 왜 출근을 하는지를 다시 상기했다.
그렇다. 나는 운동하려고 회사에 나온 것이다. 회사 일과 중 운동시간이 가장 중요한데, 갖가지 이유로 운동을 안 간다면 출근한 이유가 없다.
업무 스트레스 풀기엔 운동 만한 게 없다는 깨달음
코로나 기간 동안도 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지만, 출근을 하면 웬만하면 가려고 노력했다.
팀장은 눈치를 줬고, 혹시나 필라테스 샵에서 감염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다시 팀장이 되고 나서는
'스트레스 많고 바빠서 운동 다니겠어?'
'일에 이제 몰입해야 되실 텐데 운동 쉬셔야겠네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눈치껏, 상사가 점심시간에 먼저 자리를 비우거나 나를 찾을 것 같지 않은 날엔 필라테스 샵으로 달려갔다.
결론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나는 지금까지 점심시간 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정말이지.. 실적으로 압박을 받은 날, 업무로 질책받은 날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운동을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 꾸역꾸역 운동 가방을 들고 운동을 하고 오면 그 업무 스트레스가 풀려있었다.
아마 그 시간에 누군가와 점심을 먹으면서 질책받은 일에 대해서 상사들의 뒷담화를 했더라면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습관이 되고 보니.. 운동가는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내게 당연한 일상의 일이 되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11시 반이면 밥 달라고 요동을 치던 배꼽시계 알람도 무뎌졌다.
운동 후 간단하게 먹는 식사에도 적응되어 배고픔과 현기증도 덜 생기게 되었다.
역시 나의 정신적 멘토 법륜 스님 말씀처럼 모든 일상은 마음먹기 나름인가 보다.
그리고 고치고 싶은 게 있으면 1,000일은 해야 된다 하셨는데, 그 말씀도 딱이다.
술을 즐겨하는 습관이 없어진 것은 아닌데, 이제는 더 이상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다만 술이 좋아서, 술 마실 때 기분이 좋아서, 즐거워서 마신다.
운동 때문에 체력이 좋아진 것인지, 술로 스트레스를 조지려는 생각을 안 해서 그런 것인지, 숙취도 덜해졌다.
퇴사하는 날에 '건강은 지켰다'라고 안도하고 싶다.
나의 전 직장은 한때는 취준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으로 꼽기도 했던, 기업문화가 좋은 대기업이었다.
거기서 정말로 나이스하고 친절하고 태도도 좋고, 그래서 오픈마인드로 협업도 잘 되고 스마트하기까지 해서 나에게 자극이 되는.. 같이 일하면 즐거운 많은 동료들을 만났다.
그들이 발산하는 매력적인 향기에 내 마음이 마비되어 나는 마치 그들이 내 가족같이 소중했고,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은 사내 분위기, 회사가 제공하는 안락하고 편리한 다양한 복지를 누리며 나는 나의 시간을 회사에 점점 많이 소비했다.
요즘 신입사원들과는 다른, 나는 일체감 있는 회사생활을 했고 그건 정말 내게 소중하고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 당시엔 일이 너무 즐겁고 회사 나오는 게 너무 신났던 시절이었다.
40대가 되어 이직한 직장에서 나는 '아, 월급쟁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마지못해서 회사 다니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꼈다.
내가 이직을 하지 않고 전 직장에 머물렀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늘 재미있는 꽃길만 걸었을까?
내 대답은 '아니.'다.
전 직장에서 여전히 근무하고 있는 나의 옛 직장동료들은 지금의 나와 유사한 감정을 겪고 있다.
그들은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어떤 회사든 간에 회사가 나를 엄청 필요로 할 때는 내게 달콤한 당근을 주고, 나이 들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게 되면 다니기가 불편하고 괴로운 곳으로 변해버린 다는 것을.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둘 때, '그래도 건강 안 해치고 일 잘했다.'
라고 안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