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 프랑스
바(Bar) 사장님이 내가 주문한 와인을 글라스에 따라준 뒤, 남은 양을 확인하려는 듯 와인 병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고는 넉넉한 미소와 함께 남은 와인을 내 잔에 남김없이 가득 따라주었다. “해피 위켄드.” 여행자에게 주말이 사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마음이 살짝 들뜨고 느긋해졌다. 풍요로워진 잔만큼 행복해진 일요일 낮, 그렇게 혼자 와인 몇 잔을 마시고 사람이 많지 않은 프랑스의 낯선 도시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기분 좋게 취해서 꺼진 휴대폰과 느슨한 기억을 붙잡고 숙소를 여차저차 찾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침대에 뻗어서 푹 잠이 들었다. ‘리옹’은 내게 그런 낮잠과 여유가 허용된 여행지였다. 볼거리가 많지 않아 비교적 긴장은 덜 되지만, 먹을거리가 많아 풍족한.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리옹은 ‘미식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사부아, 동브 등 각종 고급 식재료가 나는 도시들로 둘러싸여 있어 지리적으로 미식 문화가 발달하기 좋은 환경이고, ‘요리계의 교황’이라 불리는 프렌치 셰프 폴 보큐즈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운영한 여러 레스토랑과 그의 이름을 딴 푸드 마켓 모두 리옹에 있으며, 위에서 내가 와인을 마신 곳도 실은 그 폴 보큐즈 시장 안에 있는 바였다. 리옹하면 리옹식 전통 요리를 먹어볼 수 있는 ‘부숑’도 빼놓을 수 없는데, 부숑에서 코스 요리를 한 번 먹어보면, 리옹에 왜 미식 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지 단 번에 이해할 수 있다.
폴 보큐즈 시장은, 나의 경우 영화에서 처음 접했다. ‘파리로 가는 길’의 두 주인공 남녀가 니스에서 파리로 차를 타고 가는 도중 리옹에 들리게 되는데, 그때 저 시장이 배경으로 나온다. (나는 그들과 반대로 파리에서 니스 가는 길에 들렸다) 영화에서 봤던 곳을 실제로 방문하는 건 꽤 짜릿하다. 특히나 감명깊게 본 영화라면.
영화에 나온 것처럼 폴 보큐즈 시장에는 치즈, 해산물, 채소 등 각종 식재료부터 디저트까지 팔았고, 군데군데 레스토랑이나 바도 섞여 있었다. 리옹에서 좀 더 오래 머무른다면, 하루는 시장에서 장을 봐다가 직접 음식을 해 먹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건 시간 체크를 잘 못하고 방문한 것이었다. 이 날은 일요일인데, 하필 주말엔 시장이 일찍 문을 닫는다. 그래서 내가 갔던 오후에는 가게들이 하나 둘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늦게까지 열어두는 바를 발견해 와인을 한 가득 마실 수 있었지만.
폴 보큐즈에 대해서 잘 알기 위해서는 그가 직접 운영했던 레스토랑에 방문하는 것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 개의 레스토랑을 리옹에 운영했는데, 그중 한 곳인 ‘폴 보큐즈 레스토랑’은 리옹에서 유일하게 미슐랭 3 스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 외에도 ‘동서남북’ 사방위의 이름을 각각 딴 4개의 브라세리 (고급 정찬 레스토랑보다는 좀 더 캐주얼한 음식점) 체인을 운영하기도 했다. 나는 리옹에서의 마지막 밤에 숙소에서 멀지 않은 ‘Le Sud (남쪽)’에 들렸다. 프랑스의 여느 음식점처럼 전채, 메인, 디저트로 메뉴가 구성되어 있고, 부숑보다는 격식이 좀 더 차려진 느낌이다.
폴 보큐즈의 음식점도 물론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 는 부숑에서의 식사가 더 만족스러웠다. 아마 프랑스 여행에서 가장 손꼽히는 식사가 아니었을까. 부숑은 소시지나 리옹식 샐러드와 같은 리옹의 전통 요리를 먹어볼 수 있는 음식점으로, 리옹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분위기는 좀 더 편안하고 로컬스럽다. 내가 들린 곳은 구시가지 부근, 트립어드바이저에서도 꽤 평이 좋은 식당이었다. 1층에 아무도 없어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계단으로 연결된 지하층에 사람들이 전부 몰려있었다. 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로컬 사람들밖에 없어서 살짝 주춤했지만, 안쪽에 비어있는 테이블이 있어 용기 내어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내가 운 좋게 음식을 잘하는 부숑에서 입맛에 맞는 메뉴만을 시켰을지 모르겠지만, 요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했다. 리옹식 샐러드, 비프 부르기뇽, 그리고 쇼콜라 케이크를 주문했고, 모두 맛있었지만 특히 비프 부르기뇽은 우리나라의 소고기 찜과도 비슷해 친숙한 맛이었다. 비단 맛뿐 아니라 가격과 양까지 모두 만족스러웠다. 전채만을 먹었을 뿐인데 이미 배가 부를 정도로 양이 많았고, 웬만한 음식점보다 가격대가 낮아 이 곳의 가성비를 따라올 곳은 없다고 느껴졌다.
리옹에서는 거의 먹은 기억밖에 없을 정도로 미식 여행이었다. 2박 했던 내내 1일 1와인을 했고, 항상 배부른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늘 포만감을 느낀 채 론강과 손강의 다리 위를 건넜다. 이 두 강은 리옹에 오면 한 번쯤 들리는 명소인데, 야경이 특히 더 아름답다. 리옹하면 떠오르는 관광지가 구시가지와 이 두 개의 강뿐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이미 내 배는 맛있는 것들로 두둑이 차 있고, 숙소로 향하는 길이 아름다우니까.
리옹이 매력적인 건, 미식 외에 지리적 요인도 크다. 프랑스와 니스 사이에 휴게소처럼 위치해있어서 두 도시를 여행할 예정이라면 중간에 들리기 좋고, 주변에 소도시들도 많아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또 실제로도 가장 좋았던 ‘안시’를 리옹에 묵는 도중에 다녀왔다. 아마 리옹이 없었다면, 안시까지 들리기는 좀 애매했을 수도 있다.
‘들린다’는 표현을 계속 썼지만 두 도시에게 참 미안한 표현이다. 두 도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주는 여행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