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말만 듣고 연인 의심하기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마음들
친구들 말만 듣고
연인 의심하기
밤이 되면, 타인으로부터 의도적으로 혼자가 되려는 수작을 부린다. 어둠 아래서 오가는 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쓴 술을 적잖이 삼킨 뒤라면 더욱 그렇다. 그 말은 대체로 공평함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하소연의 무게로 기울어진 시소만큼 공평하지 못한 시소를 나는 본 적 없다. 그 반대편에 억지로 올라앉는 일은 또 얼마나 성가신가. 상대가 뱉은 말이 진실과 나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티를 내어선 안 되거니와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당신이 세상을 착시하는 일에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게 좀 잘 안 된다.
마주 앉은 당신에게 자주 다정했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 그래서 해가 지면 자주 혼자 사람이다. 밤에는 대답을 강요하는 것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나를 지킨다. 방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그것들은 정해진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질문만 할 뿐이다. 또한 불편한 옷을 입고, 바른 자세로 앉을 필요도 없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자세로 가장 깊숙한 나를 찾아 하루를 위로한다. 그리하여 나를 지키고 당신을 지키기 위해 자주 까칠해지기로 결심한 밤이 어느 해에 여러 날 있었다.
“나 친구 많다.”
어려서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친구가 전부였던 시절에 친구가 많다는 것은, 재산이 많은 것만큼 부럽고 질투어린 일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커서는 영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 재산의 출처를 의심한다.
와인 바를 빌려 성대하게 준비한 지인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일을 통해 만난 사이여서, 참석하더라도 아는 사람 한 명 없을 것이 분명했고, 그런 허영된 분위기 속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의례적으로 통 성명하는 일에 쉽게 지친다. 어찌어찌 가기로 약속했다면, 나는 일주일 전부터 파티에 입고 갈 의상에 온 신경을 쏟았을 것이 분명했고, 선물은 또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인스타그램을 들락날락 거리며 대충 끌어 모은 정보로 버거운 구색 맞추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날 밤, 실시간으로 업로드 된 사진을 통해 그 곳의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었다. 웅장한 공간, 치워지길 기다리는 와인잔의 갯수만으로 대략 손님의 규모는 백 명은 거뜬해 보였다. 나는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일파티에 백 명의 손님이 찾아와주었다면, 지인 또한 답례를 하러 그들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겠지. 그렇다면 그는 일 년에 백번,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는 말 아닌가. 그들이 전부 친한 친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삼일에 한 번 꼴로 이 사람 저 사람 주변을 기웃거리는 당신은 과연 언제 시간을 내어서 아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지 그게 나는 몹시 궁금했다.
자기를 먼저 돌보지 않는 사람은 얕은 생각에 현혹되기 쉽다. 사랑을 할 때, 직감에 확신이 없어서 자꾸만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직접 느끼는 감정보다 친구들이 해주는 조언을 맹신한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에 대해 반시간 이상 이야기하고도 좋은 이야기만 하는 성자를 본적이 없다.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지는 때, 연인에 대한 의심만 잔뜩 품고 택시에 올라타는 상황을 수없이 봐왔고, 그 때마다 참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영화 <그래비티>를 흥미롭게 봤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굳이 언급할 것도 없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을 위해 줄거리를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맷 코왈스키)는, 폭파된 러시아 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우주선이 부서지고, 동료를 모두 잃고 만다. 둘은 우주를 헤엄쳐 중국 정거장을 찾아가게 되지만, 조금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던 당시 상황은, 라이언을 살리기 위해 조지가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만든다.
지구로부터 600km 떨어진 곳에서 황망히 우주 미아가 되어 버린 라이언은, 지독한 쓸쓸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그 여린 마음에 딸을 잃은 상실감마저 더해져 결국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극은 조지가 살아 돌아오면서 반전의 국면을 맞는다. 딸이 없는 지구는 그녀에게 더 이상 의미 없는 곳이었으나, 지구에는 있고 우주에는 없는 중력과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삶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또한 유일한 희망이었던 딸이 없는 장소가 지구라 해도, 죽은 딸의 흔적이 남은 유일한 장소가 지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력이 작용하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발버둥을 시작한다.
딸을 잃고, 중력을 잃고, 마지막엔 공기마저 잃어가는 이 쓸쓸한 영화를 보면서 참 연인의 사랑을 많이 닮았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왜 사랑이 끝나봐야 그 소중함을 알 수 있다고 밥 먹듯이 말해왔던가.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날 때쯤 잃게 되는 것이 중력과 공기라서 그럴 것이다. 일상에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많은 것들을 뒤늦게 후회하고 자주 그리워한다. 때로는 고열에 시달려 죽을 것처럼 아플지도 모른다. 몸이 중력을 잃고 붕 뜨는 느낌, 숨을 헐떡이며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것까지, 사랑은 우주와 우주가 만나 맺은 관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소중하다는 말로, 모든 사랑의 빈 공간을 막을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이별을 선택하려는 때, 참견하고 틀어막고 싶은 이별이 있는데, 그건 친구들의 말에 자주 현혹되어 연인을 의심하다 빚어진 이별이다.
사랑은 직감으로 하는 거다. 누구의 허락이 필요한 결제서류가 아니다. 그런데 자꾸만 친구들을 찾아가 확인서명을 받으려 한다면, 직장 상사가 그러하듯 흰 백지만 보고서도 문제점을 만들어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지구 안에서만 유효하다. 연인을 지구에 남겨둔 채, 자꾸만 혼자 우주로 가 인공위성 안에 숨어서는 안 된다. 위성의 속성은 태초부터 지구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어서, 그 안에서는 제 아무리 관점을 바꿔도 눈에 보이는 건 사랑하는 이의 결점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