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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Jan 26. 2021

<내가 읽는 책과 영화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읽는 책과 영화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죽은 사람을 만나는 건 힘들어. 죽은 사람을 어떻게 만나? 의아하겠지만, 정말 죽은 사람을 만난다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파괴시켜 정신적으로 죽음 문턱 앞까지 걸어가는 사람을 나는 죽은 사람이라 일컫는다. 자기가 가진 슬픔과 분노를 상대에게 그대로 전가하려는 사람(특히 회사에 많음), 그래서 결국 상대방이 어둠으로 물들고 나면 그제서야 만족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 마주하는 때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오른다. 여분의 생동감마저 잠식당하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내가 가진 환함은 쉽게 빛을 잃고 만다.

 ‘아,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을 걸.’

 지난 금요일 밤, 헤어짐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화는 장마철의 습기처럼 우중충했고, 마음에선 곰팡이가 피는 듯 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자는 말을 거절할 수 없어 시작된 두 번째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오늘은 금요일 밤이란 말이야. 모든 직장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 내가 너 하소연 들어주려고 금요일 밤만 기다린 게 아니라고 이 녀석아, 라고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인간적인 도의마저 져버리고 싶지 않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집어 삼켰다.
 
 시간은 유효하다. 그걸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시간을 멋대로 소진시키지 않는다. 나라고 하고 싶은 말 없을까요. 칭얼거리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당신이 받고 싶은 모든 것들이 나도 받고 싶지만, 당신의 시간을 검게 물들일 수 없어 말하지 않는 것뿐인걸요.


 풀리지 않는 고민,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처럼 혼자만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오면 책을 펼친다. 글조차 읽히지 않을 땐 영화를 본다. 남의 슬픔에 내 슬픔을 이입시켜, 주인공을 위로하는 척 속으로 울어버린다. 괜히 어쭙잖은 위로라도 받아보겠다고 친구 불러내지 않는다. 둘 다 힘들어질 뿐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웬만한 슬픔은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은 내가 읽는 책과 영화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특히 금요일 밤과 같이 한 주 내내 기다려온 황금 같은 타임은 고작해야 서 너 시간 남짓이다. 이 시간에 난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지난 밤 내가 당신을 만나러 나간 것은 책과 영화를 포기한 대가였다. 그것들에서 오는 사무친 영감을 포기하고 당신을 만나러 나갔던 거다. 나는 책과 영화가 너무 좋은데. 이게 너무 좋아서 사람 만나는데 별다른 취미 없이 방안에 갇혀 뒹굴 거리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과 잘 지내야 한다면, 관계 맺는 당신은 내가 읽는 책과 영화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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