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연민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탄 소년'을 보고

by 썬캡맨



다르덴 형제들의 영화는 (다른 감독들도 그렇지만) 몇 번 보다 보면 이 감독의 특색을 읽을 수 있다.

음악이 거의 없고 구성이 직관적이면서 시간순이며 단순하다. 거기에 마치 다큐멘터리를 연상하게 하는 기교나

어떤 기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를 사람의 눈처럼 사용하는 감독이다. ‘자전거 탄 소년’도 그렇지

만 감독의 전작인 ‘프로메제’나 ‘아들’을 보다 보면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그 시선이 굉장히 따스하면서도 윤리적이라 등장인물들을 재단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정감 어린 시선을 잃지 않아 관객들로 하여금 빠져들지만 어떻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가를 통찰하게 하는 굉장히 묘한 카메라를 사용한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통일적인 장면이 있는데 다르덴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나 혹은 그에 해당되는 비중의 사람들은 조수석에 앉게 된다. 이 조수석에 앉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은 운전석에 앉는 사람이지만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수석에 앉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 외에 딱히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켜보는 것조차

전방주시를 해야 하기에 계속 응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짧게, 단편적으로 보는 것. 그것이 형제들의 일관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줄거리 요약


시릴은 고아원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집에 전화를 건다. 그러나 집은 이미 비어있고 그것을 믿지 못한 시릴은 몰래 학교에서 빠져나가 옛 집이 있는 건물로 향한다. 빈 집에 벨을 눌러도 1층의 스크린 도어를 열지 못하자 병원을 통해 집에 가려고 한다. 그러나 시릴의 부재를 알게 된 고아원 관계자들이 시릴을 잡으러 오고 시릴은 옆에 있는 사만다를 어거지로 껴안으며 어른들의 손길을 거부한다. 사만다는 그런 시릴에게 동정하고 그가 타던 자전거를 되찾아주고 주말에 위탁모가 되어준다. 사만다는 시릴과 시릴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지만 아버지는 시릴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내치게 된다. 사만다와 살게 된 시릴은 동네 불량배의 눈에 띄게 되어 그가 하는 강도짓을 돕게 되지만 실패하자 그에게도 버림받는다. 시릴은 다시 사만다에게 돌아가고 사만다는 그를 받아준다. 시릴과 사만다의 갈등이 끝나고 바비큐 준비를 하기 위해 시릴 혼자 주유소에서 숯을 가다 전에 강도짓을 하느라 폭행했던 부자를 만나고 화가 난 아들에게 쫓겨 나무로 피하다 돌에 맞고 떨어진다. 부자는 사건을 조작하려고 하던 찰나 시릴은 일어나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첫 장면


첫 장면은 어떤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지만 번호가 없다는 것만을 알게 되고 아빠가

떠났다는 말을 듣고서 어딘가로 뛰어나간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의해 제지당하고 그 때 베토벤 교향곡 황제가 짧게 나온다.

첫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영화세계로 던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첫 장면은

그 세계를 설명하거나 혹은 상징하는 수단으로 많이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소년의 상태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시작하는 것이다. 소년이 어떠한 상태인지 흔한 자막이나 내레이션 없이 아빠는 떠나갔고 소년은 믿지 못하며 집에 가서 확인을 하고 싶은 상태. 그것이 영화의 첫 장면이자 소년의 현 상태이다.

movie_image.jpg?type=m886_590_2 둘은 같은 곳(같은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시릴과 사만다의 관계성

영화의 제목은 자전거 탄 소년이고 등장인물인 시릴은 자전거를 탄다. 그러나 시릴의 처음 상태는 자전거도

찾아야 하고 아빠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래서 학교에도 빠지고 아빠의 옛 아파트로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사람이 없어서 아파트 건물 안에 있는 병원에서 벨을 눌러 건물로 들어간다. 소년은 아빠를 찾기

위해 병원에 벨을 눌러야 되는 상황에 찾아야 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고아원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도중

‘사만다’라는 여성을 붙잡으면서 아빠를 만나야한다면서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는 환자가 가고 처방을 받는 곳이다. 시릴의 상태는 아버지의 부재로 치유가 필요한 상태, 결핍된 상태이다. 그렇기에 시릴은 병원에 가야만 했고 거기서 어떠한 것이든 처방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으면서 농성을 했고 그 농성의 대상이 바로 사만다인 것이다. 영화에서 사만다는 우연히

시릴에 의해 선택되었다. 어떤 이유나 인과관계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릴은 사만다에게 도움을

청했고 사만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릴이 원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연민과 책임은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게 연민과 동정을 주는 순간 그 대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는 책임을 요한다. 이것은 다르덴 형제들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동일하며 ‘자전거 탄 소년’도 제외되지 않는다. 사만다는 시릴의 행동을 보면서 동정과 연민을 품었을 것이고 그 연민은 그냥 연민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만다는 시릴의 위탁모가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관객은 영화를 보는 순간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만다가 시릴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사만다가 시릴을 보며 위탁모가 되었다면 관객은 영화를 보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영화와 관계된 순간 전과 같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다르덴 형제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영화는 이어진다.


시릴의 상태


영화에서 시릴은 항상 뛰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탄다. 항상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속도는

방향성을 전제로 한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빨라진 것이다. 이런 시릴이 멈추는 때 크게 두 번 있다.

아버지의 아파트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시릴은 가만히 있는다. 이 때의 카메라는 시릴의

얼굴을 보여준다. 입을 다물고 시릴은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아빠의 옛 주소를 따라가서 집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다. 빈 집을 서성이면서 자신이 계속 뛰고 달려와 확인해야 할 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하자 그는

정지한다. 그에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 방향성의 상실은 그에게 적막을 안겨준다. 시릴은 그 상황을 견질 수

없다. 무언가를 해야 하거나 어디론가 가야한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안(安)은 풀이하자면 집에 여자가 있는 것이다. 한자의 특성상 여성이라는 개념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편안하기 위해서는 나의 공간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다. 시릴의 심적 공간에는 아버지가 있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를 갈구한다. 그런 상태는 계속 강박증을 낳고 뛰게 한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시릴을 항상 조급하며 뛰려고 한다.


사만다의 역할


영화의 주인공은 시릴이고 카메라는 거의 시릴만을 조명하며 타인들이 와도 시릴의 주변에만 묘사할 뿐이지 제대로 그리지 않는다. 사만다도 영화의 한 주인공이기도 한데 등장하는 순간에는 시릴이 잡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이것이 비중 있는 캐릭터라고 하는 클로즈업이나 여타 다른 기법이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만다만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굉장히 이질적이다. 편집증적일 정도로 시릴만을 쫓던 카메라가 사만다만을 찍는다. 구태여 이 장면을 넣은 것은 주제의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감독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묘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은 동의할 것이다.

사만다는 시릴이 밤에 마약을 파는 불량배와 노는 것을 막지만 끝끝내 실패한다. 막는 실랑이에서 시릴은

머리 자르는 가위로 자신을 찌르며 도망갔고 자신도 시릴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기대가 무너지자

사만다는 울게 된다. 그리고 시릴이 있었던 고아원에 전화를 건다. 이 때 관객들은 사만다가 시릴을 포기 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한다. 영화에서 전화를 걸고 바로 시릴에게 화면이 전환되기에 제대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관객은 고아원 원장에게 위탁모를 포기한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묘사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상은 시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만다와 한 유일한 약속인 불량배와

놀지 않는 것도 어기고 가위로 팔을 찌를 순간 시릴도 사만다가 자신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상상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까지 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사만다가 하는 행위의 근거는 묘사되지 않는다. 왜 시릴의 위탁모가 되었는지, 그리고 시릴이 사고를 친 것을 다 받아주고 자신을 내치지 않았는지. 여기서 다시 살펴볼 것은 영화는 시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상당히 단순한 영화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기 쉽다. 이것은 흡사 시릴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 같다. 그래서 시릴을 주로 찍으며 시릴 외의 것은 거의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빠의

입장이나 혹은 선생의 입장 다른 사람의 입장은 묘사하지 않고 시릴의 내면만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릴의 앎의 범위하고도 연관이 된다. 시릴은 현재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추측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는 오로지 그 자신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만다가 왜 그렇게 까지 자신에게 잘 해주는지 모르는 것이다. 시릴이 모르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묘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만다가 고아원에 전화를 거는 것까지만 묘사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시릴은 사만다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버려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만다가 고아원

원장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바로 시릴에게 화면전환 된 것은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만다는

원장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러한 행동도 시릴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만다만 나오는 장면을 통해 시릴에게 다른 사람의 입장을, 감정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movie_image.jpg?type=m886_590_2 사건이 다 끝나고 가족이 된 시릴과 아만다


책임


일반적인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영화에서 가장 밋밋할 수 있는 부분은 클라이맥스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이나 기술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시릴은 불량배와 엮여 무고한 가게 사장을 방망이로 기절시킨 후 금품을 앗아간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나 책임은 사만다가 지불한다. 그에게는 사과하는 것 외의 책임은 없으며 그리고 지금껏 그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는 고아원에 살고 사회적 약자이자 어린이이다. 그가 하는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많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다 보면 아이의 잘못을 두둔하는 쪽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사만다와 시릴이 모든 갈등을 이겨내고 화목하게 바비큐 파티를 준비할 때, 시릴과 부자를 주유소에게 만나게 한다. 시릴은 여기서 아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이 장면을 본 일반적인 반응은 이제 계속 당하기만 했던 시릴이 그들 부자를 향해 다시 복수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시릴을 아무 말 없이 떠나보낸다. 시릴은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였다. 그런 그에게 영화는 그가 복수할 기회와 회개할 기회를 동시에 주고 시릴은 회개를 택했다. 이것은 그가 했던 부족했던 과거를 책임을 지는 행동이자 관객으로 하여금 저 아이는 저런 책임을 졌고 변화했으니 관객이 보지 않아도 잘 성장할 것임을 암시한다.


마지막 장면


이 장면은 전과 다른 카메라 구도로 찍었다. 지금껏 카메라는 모든 장면에서 거의 시릴 만을 찍었다. 그만의

내적 갈등과 고뇌를 가까이 찍어 관객에게 시릴에게 연민과 책임을 동시에 선사하게 하고 그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자전거 탄 소년, 시릴을 카메라는 그 때 처음으로 정지하여 바라본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탄 소년을 뒤에서 밀다가 어느 순간 손을 놓고 페달을 밟는 소년을 바라보듯이 영화의 카메라는 말없이

골목길로 사라지는 소년을 제자리에서 응시하다 끝이 난다. 이 때의 카메라는 감독과 관객의 시선을 하나로

만들어 우리 사회가 시련과 고초를 겪는 소년을 앞으로 연민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주제의식


연민과 책임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연민하는 순간 책임을 가져야 한다. 시릴의 아빠는 시릴을 대하면서 연민하지만 책임을지지 않는다. 이것은 겉으로만 연민하는 것이자 본인 스스로를 연민한 것이지 시릴을 연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책임을 다한 순간 연민은 사라진다. 결말에서 골목길로 사라진 것을 카메라가 잡지 않은 것은 시릴이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다했기에 관객의 연민도 끝이 난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의 삶에서 연민과 책임을 동일시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