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이 보는 삶
김수영의 「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풀이라는 것은 대중과 연관 깊은 소재이다. 민초(民草)라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풀은 꽃이 아니다. 그래서 주목받기도 주목하기도 쉽지 않다. 누가 풀에 주목을 하겠는가. 색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향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벌과 나비도 풀과 어울리지 않는다. 소위 노는 물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풀잎들>의 인물들은 풀잎을 공유한다. 어떤 이는 사랑스럽게 만지고 어떤 이는 쓸쓸하게 만진다. 그들은 모두 풀잎을 바라보고 골목을 공유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풀잎을 보는 것과 골목에 있다는 것 외에 없다. 골목과 풀잎처럼 그들의 생은 참으로 널리고 보잘것없다.
인물들의 대화는 고유성이 없고 특별하지도 않다. 심지어 이름도 제대로 호명되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 그들이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있는 카페에 모인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그들은 돌려서 말한다. 그 에두름이란 다른 사람이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첫 장면에서 서로에게 화를 내는 남녀는 무언가 쌓인 앙금을 말하고 있다. 그들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들의 문제로 생각하고 말한다.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이름을 말하지만, 그 이름이 다른 사람이더라도 크게 상관없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겉돈다. 대화는 계속 겉돌고 그들의 특수성을 없앤다. 그리고 풀잎이 된다.
그들이 직면한 것은 끝이다. 무상이다. 죽음이다.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햇볕이 뜨거우면 죽기에 그들의 입장은 항상 끝 앞에 서 있다. 그들의 생은 순식간이다. 흰 말이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식간이다. 그런 찰나 속에서 순간을 잡아야 한다. 순간을 잡고 끝을 잊어야 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이 최고야. 나머지는 그게 안 돼서 하는 거야’는 사랑만이 그들의 끝을 망각하게 해주기에 최고라고 들리는 것 같다. 아름이 말하듯이 그들은 잊고 싶어 사랑한다. 죽은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잊기 위해. 그런 행위를 거듭하면서 그들은 같은 끝을 맺게 되리라는 걸 생각지 않는다. 그냥 잊는다. 말이라는 건 술과 비슷하기에 하다 보면 어떻게 시작했는지 잊어버린다. 대화는 대화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냥 대화에, 사랑에 탐닉한다.
풀잎들은 뿌리내린 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물들도 골목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갔지만 다시 돌아오고 만다. 카메라는 골목 밖을 나가지 않는다. 마치 풀잎처럼 자신의 준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풀잎의 시선은 온도를 잃었다. 그 시선은 색을 잃었다. 그렇기에 되찾으려고 한다. 여기 인물들을 무엇인가를 잃었다. 아름은 사랑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고 경수는 같잖은 수작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의 동기는 그들의 과거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오게 한다. 인물들이 입으로 지나치거나 혹은 이상하다고 표현되는 행동은 그러할 만한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과거는 묘사되지 않는다. 과거는 나이테와 같다. 설터의 말을 빌리자면 나무에 있는 나이테처럼, 삶은 흉터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가 나이테를 드러내지 않듯 삶은 흉터를 드러내지 않는다.
결말에서야 그들은 다시 한곳으로 모인다. 좋지는 않지만 부대낀다. 그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밖에는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는 이상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살아있기에 만날 것이고 살아있기에 다시 헤어질 것이다. 삶을 벗어나기도 할 것이고 삶을 파괴하기도 할 것이다. 저주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어쩔 수 없는 것은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슬프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삶이 최고이기에. 그것 외에는 할 것이 없기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