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이의 모험>이 계속되는 이유─
‘시간이 답’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간의 힘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무정함에 대한 탄식이다. 일상은 시간을 뒤에 엎고서 모든 감정을 좀먹는다. 그렇기에 감정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운과 재능이 없는 몽상가가 대표적이다. 몽상가들은 운과 재능이 없어도 지기는 싫어하기에 생각한다. 시간을 무력하게 할 수 있는 것에 무엇이 있는가?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에서는 <튼튼이의 모험>처럼 운과 재능이 없는 주인공 성우가 나온다. 성우의 현실은 쓰다. 같이 동거 동락한 밴드 멤버가 고향에 갈 정도로 쓰다. 그러나 그는 버틴다. 잔혹한 시간의 힘에도 버틴다. 성우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술을 먹거나 오입질을 하거나 지방으로 내려가 일상에게 굴복하는데도 성우는 버틴다.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건 바로 순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음악 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인희와 함께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전에 있던 시간과 후에 올 시간을 무력하게 한다. ‘형성된 모든 건 변한다’는 말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과 시간을 비교하는 사람들은 후자에 더 큰 가치를 두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그것은 찰나에 대한 것을 무의미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게 된다. 그러나 그 찰나를 기억하는 것이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기는 방식이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말했다.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라고. 사랑의 원인이란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근거해 오지 않는다. 이런 사랑을 하는 성우는 당연히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교통비 정도의 분통을 터트릴 정도로 수입이 적어도, 장례식에서 밥이 시원찮더라도 감내할 수 있다. 그런 성우이기에 음악을 포기할 일은 더욱 없고, 그런 성우이기에 학창 시절 매몰차게 고백을 거절한 인희조차 그와 함께 음악을 한다. 이에 따른다면 사랑은 시간과 같이 오는 것이다. 시간은 사랑과 같이 떠난다. 그렇다면 시간과 같이 오고 가는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하는 것인가. 순간이 제거된 영원이라면 그럴 것이다. 영원은 어제와 오늘을, 오늘과 내일을 같게 한다. 시간 속에서 순간을 멸시한다. 그렇기에 시간 속에 순간을 건지는 것은 무용(無用) 한 것, 쓸데없는 짓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튼튼이의 모험>에서 충길은 어떠한가.
화이부동(和而不同)
첫 장면은 텅 빈 교실에 충길이 잠자는 장면이다. 충길이라는 캐릭터는 학교에서, 교실에서 잠을 자는 사람. 죽어있는 사람. 꿈을 꾸는 사람이다. 수업이 끝나도 끝난 줄 모른다. 이는 그의 학교생활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비치지만 그가 끝을 모른다는 캐릭터라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잠의 끝은 다른 사람, 이름과 얼굴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 알려준다. 작품에서 끝은 타인이 알려준다. 본인은 알지 못한다. 여기서 잠을 깨운 행위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의 일은 피해를 주기 위함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저 일이다. 덕분에 충길은 잠에서 깨어난다. 잠을 깨우는 행위는 사적인 감정이 섞인 것도 아니고 일부러 충길을 깨우기 위한 모략도 아니다. 그 사실을 충길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가만히 일어난다.
충길은 방학을 맞는다. 그의 방학은 학교생활과 같다. 단조롭고 규칙적이다. 식사하고 청소하고 일을 하고 편지를 쓴다. 단편적으로 나오는 장면들만 보아도 그의 생활은 일상 속의 따분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왜 따분할까.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기술을 알려주던 레슬링 코치는 버스 기사를 하고 같이 레슬링을 하던 진권은 막노동을 뛴다. 그들의 일은, 노동은 돈을 벌고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유용하다. 영화에서 충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도 돈이다. 충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코치, 진권 등은 돈을 말한다. 돈 없이 살 수 없으니까. 충길, 역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처지이다. 다만 돈에 신경 쓰지 않는다. 슈퍼 사장님이 풋내기라서 돈을 많이 주지 못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돈이 그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도 자본주의 체제에 속한 인물이다. 좋든 싫든 자본주의에서 자본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라는 무식하고도 무시 못 할 압박 속에서 충길은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본이라는 유용함에 동조하지 않는 충길의 태도는 무용함을 지지하는 것이고 순간을 잡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숫자로 경중을 매긴다는 점에서 시간과 같다. 그리고 충길은 자본과 시간의 수에 굴복하지 않는다.
고정된 카메라, 동요하는 카메라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카메라의 척추가 철로 되어있는 듯하다. 카메라는 스스로 움직이거나 혹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흔들림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흔들리는 것, 움직이는 것은 프레임 안의 인물들뿐이다. 영화는 고정 숏으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 중 극적으로 시선의 고정을 보여주는 것이 쥐약 소동이다. 어느 인적 없는 곳에서 쥐약을 산 진규가 막걸리를 마시면서 일련의 소동이 발생한다. 충길이 진중에게 날아 차기하고 진권이 다시 날아 차기를 하고 이렇게 인물의 역동성이 제일 두드러지는 장면임에도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오히려 무신경할 정도로 고정되는 숏이 영화를 더 영화로 만드는 인위성을 전면으로 배치한다.
하지만 이 규칙이 어겨지는 장면이 있다. 혁준이 블랙 타이거 멤버와 싸울 때와 학교 체육장에서 레슬링 시합하는 장면이다. 바닷가에서 지혜와 혁준이 데이트를 즐길 때 오토바이를 타고 블랙타이거 모임에 안 오느냐며 화를 낸 멤버가 온다. 이때 카메라는 이 멤버를 주시하며 따라 움직인다. 이 시점은 충길의 시점을 대변한다. 사실상 혁준이 레슬링을 한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전의 준거집단이 블랙타이거를 제대로 청산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걸어오는 멤버의 말을 추론하면 그들이 서로 납득할 만한 끝맺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혁준이 블랙타이거로 갈 것인지 계속 레슬링을 할 것인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충길은 동요할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도 덩달아 동요한다. 하지만 실제로 레슬링 부를 그만두겠다고 한 진권을 대할 때 카메라는 동요하지 않는다. 코치가 그를 회유할 때도 혹은 진권이 그만둔다고 했을 때에도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충길이 진권을 잘 알고 그가 다시 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준은 그렇지 않으니 흔들린다.
다시 동요하는 카메라가 있다. 혁준과 충길의 첫 시합이다. 이때는 이길지 질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카메라는 시합을 따라서 계속 움직인다. 하지만 이때의 인물들의 움직임은 쥐약 소동 때보다 역동적이지 않는다. 오히려 심심하다고 할 수 있는 시합에 그토록 카메라가 흔들리는 건 그것이 충길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혁준이 블랙타이거와 엮였을 때, 승패를 알 수 없는, 외부적 영향으로 방향이 확실하지 않은 장면에서는 저절로 충길과 카메라는 동요하게 되는 것이다.
충길의 두 번째 경기, 마지막 시합은 코치가 말하듯이 상대가 누구라도 충길은 자신의 경기를 펼쳐야 한다. 왜냐면, 승산이 없으므로. 영화에서 반복해서 묘사하듯이 충길은 재능도 운도 없다. 5년을 했어도 블랙타이거 사람들보다 약하고 시합 전날에 한 축을 담당하던 진권도 영화에서 따오자면 ‘병신’이 될 수 있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그런 그가 그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처지에 서게 되었다.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그런 시합에서 영화는 그들의 경기보다 충길에게 더 초점을 맞춘다. 충길의 일그러진 표정, 넘어가는 모습, 해변에서 달리는 모습. 이 모습은 레슬링 장면처럼 카메라가 시종일관 따라가지는 않지만 흔들린다. 사실 상대방에게는 관심이 없다. 전에 카메라는 승패를 모르는 시합에서 경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충길의 두 번째 경기는 코치도 알고 충길도 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충길은 질 것이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마지막일 리 없다고. 그래서 카메라는 그들의 경기를 시종일관 따라가는 대신 충길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흔들린다. 충길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지나친 고정 숏을 사용하면서 영화에 인위성을 부여하면서도 카메라는 그걸 지켰다. 그리고 불안한 순간에는 아낌없이 흔들렸다. 그래서 고정 숏은 고정 숏의 자체의 효과를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을 부각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정 숏이 영원성이 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빛을 묘사하듯 마음을 묘사한다
이상하게도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를 찾는다고 하면 다름 아닌 거울이다. 충길과 코치의 버스 안에서도. 혁준과 그의 누나의 이발소나. 대화하는 곳에서는 빠짐없이 거울이 있다. 거울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가. 주변에 폐업한 거울 공장이라도 있단 말인가. 다만, 그런 묘사는 일절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런 추측은 비약이다. 거울이 무슨 일을 하는가. 그냥 비춰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거울이 영화에 없다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거울이 없다고 해서 스토리에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만. 스토리에 큰 상관이 없는 거울이 많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거울이 중요하다는 방증이 된다.
거울은 무엇인가. 빛을 비추어준다. 다만 정확히 비추어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인물들이 대화하는 곳에는 거울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화에 능숙하지 못하다.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고 인신공격까지 해댄다. 그들이 대화하면 곧 감정적인 분출이 될 뿐이다. 가장 대화가 빗나가는 인물은 충길과 그의 아버지이다. 충길과 아버지의 세 번째 식사 장면에는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텔레비전이 있다. 블랙 미러가 있는 것이다. 이 화면은 그들을 비추지 않는다. 상관없는, 맥락 없는 영상만이 나온다. 전부 광고 영상이 나온다. 광고는 당연히 돈에 관련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케팅의 산물이다. 그래서 충길과 아버지의 대화도 계속 돈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가 말하는 돈에 충길을 반대하든 동의하든 돈을 말할 수밖에 없다. 대화의 주체가 자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충길과 아버지의 네 번째 식사 장면에 텔레비전은 광고 같은 단발성 영상보다는 어떤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는 영상이 돌아간다. 그때의 영상은 그의 취향을 인정해주고 보듬어주는 시선과 내레이션으로 화면의 남자를 지지한다. 이때, 부자의 대화는 블랙 미러의 안처럼 정적이고 평온하다. 첫 번째 식사 장면은 맥락 없는 광고 영상이, 두 번째의 식사 장면은 톤은 부드럽지만 대립하는 남녀가 나왔다. 그런 점에서 네 번째가 돼서야 아버지가 충길을 지켜보기로 한 상태가 되었다. 코치와 충길 아버지의 때의 블랙 미러는 개가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개는 충길이다. 개를 돌보는 가족들은 개를 걱정하고 아낀다. 그런 가정적인 이미지가 나오는 영상에는 서로를 가족같이 대하는 코치와 충길이 아버지가 있다. 코치와 아버지의 대화 분위기는 무뚝뚝하고 정이 없지만, 텔레비전에는 온화하게 그려진다. 그러면 혁준과 혁재의 대화는 무엇인가. 중식집에 간 혁준의 뒤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에는 시계가 있다. 형제들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때가 있다면서 혁재는 혁준에게 때가 있다고. 내가 너라면 뭐든지 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렇듯 그들의 대화가 성립되는 곳에 있는 거울에는 그들의 본심을 보여주고 있다. 신기한 것은 사람 한 명이 거울을 대할 때는 진실해지는 것이다. 미용실에 자주 오는 단골이 혁준의 누나가 사라지자 바로 혁준의 뒷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을 들은 혁준은 다른 사람의 진심을 듣고서 레슬링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혁준이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이 폭발하는 순간도 있다. 시합 전날, 체육관에 있을 때 충길과 혁준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카메라는 혁준과 그의 뒤에 있는 창을 찍는다. 충길과 대화를 나누지만 실은 혁준은 상대방에게서 대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백과 다를 바 없다. 창은 거울이 아니지만, 밤이 되면 거울이 된다. 밤이란 달이 빛나는 시간이다. 달은 혁준에게 꿈이다. 꿈이 빛나는 시간에 그는 진실하다. 코치는 시합이 끝나자 혼자가 된다. 더 이상 버스에 충길은 없다. 버스 후사경에는 충길이 보이지 않는다. 코치가 있다. 코치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토록 반복했던 책임을 지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에게 진실은 묵음이다. 그러나 그 묵음은 그가 택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침묵을 대변한 것이다.
충길의 체육관에는 사진이 있다. 두 팔을 벌린 채 영광스러운 순간을 찍은 사진이. 이 사진을 보고 충길은 자신도 팔을 벌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충길이 똑같은 자세를 취한 이상 곧 충길의 거울이 된 셈이다. 그 거울 앞에서 충길은 레슬링 동작을 취하고 연습을 한다.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연습을 하는 것은 시합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는 다시 시합에 나갈 것을 암시한다. 아버지에게 이번 시합만 하고 진권에게 이번만 도와달라고 한 것은 그의 연습 앞에서 거짓말이 된다. 그의 진심은 레슬링을 계속하는 것에 있다.
영화에서 거울은 대상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수치상의 시간으로 봤을 때, 거울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물건이다. 사람이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몇 분이나 대하겠는가. 하지만 거울을 그 몇 번과 몇 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 자신을 보기 위한 순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순간에만 거울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거울을 몇 분밖에 보지 않는다고 거울이 쓸모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는 순간, 마주 보는 순간에만 있는 것이 있다. 그때의 거울은 대상과 조응한다. 거울은 비춘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자가 거울을 볼 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다듬기 위함이지 거울을 다듬어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거울은 대상을 숙주 삼아 주체의 가치를 정립한다.
햇빛을 거부하고 달빛에 흔들린다
충길, 혁준, 진권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결핍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그들의 결핍은 공통점이 있다. 충길의 경우. 아버지와 산다. 어머니와 누나는 없다. 영화에서 거론되지만 등장하지는 않는다. 혁준은 누나와 형만 있지 부모님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 진권은 어머니가 외국인이며 아버지가 없다. 이들의 결핍은 서로를 보완해준다. 혁준은 부모가 묘사되지 않지만, 형제자매가 있고 충길은 형제자매가 없지만, 아버지가 있고 직권은 아버지가 없지만 어머니가 있다. 가족 내의 결핍에서 셋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그들은 레슬링을 한다. 좋아서 하기도 하고 이것밖에 없어서 하기도 하고 포기하기 싫어서 하기도 한다. 그들이 레슬링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그들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셋이 레슬링을 할 때 그들은 가족이 된다. 그들은 같은 지붕 아래서 자고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쓴다. 이들의 실제 가족조차 이렇게 산다고 표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 가족일 수 있을까. 게다가 셋이 나누는 대화의 톤이나 온도가 가족에게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혁준은 두 부모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아이와 같은 위치를 지키고 있다. 블랙타이거와 레슬링 동아리가 두 개의 준거집단이 혁준에게는 가족과 비슷한 층위를 제공한다.
블랙타이거 멤버들끼리 분식점에서 싸울 때 가게 주인이 와서 경찰서에 가게 된다. 혁준의 형인 혁재가 그토록 난동을 피우는 것은 혁준을 뺏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혁준을 그대로 둔다면 혁재와 혁준은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석재는 결핍되기에 난동을 피우게 된다. 인물들의 행동은 꿈이나 희망 같은 긍정적인 것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트라우마와 결핍으로 행동한다. 그렇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햇빛이 아니라 달빛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것이 있다. 혁준이 레슬링부에 맛보기로 있을 때, 지혜가 먹을 것을 들고 방문한다. 그때 혁준은 지혜에게 반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꿈이나 희망 같은 긍정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굳이 레슬링부에 들어오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다. 그가 부에 들어오게 된 것은 손님이 자신의 뒷말을 하고 그로 인한 누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가 일하는 곳을 방문하여 커피를 사준 것도 충길과 지혜가 가까이 지내다가 충길과 이어질까 봐 불안해서 한 것이다. 이것은 진권의 쥐약 소동 때, 지혜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혁준과 블랙타이거 멤버와의 불화도 불안 때문에 발생한다. 블랙타이거는 혁준이 나가는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그래서 혁준을 회유한다. 그렇지만 회유하는 수단도 당근이 아닌 채찍을 사용한다. 지혜의 피부색을 놀리고 선배의 이름을 말하면서 혁준에게 오지 않으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을 한다.
영화의 시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풍고 레슬링 동아리는 폐부의 위기에 처했다. 그 전에는 오히려 레슬링부가 더 활발히 운영되었을 것이다. 정작 영화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폐부에 놓인 그들이 어떻게 폐부에 대처하는가에 대한 행동에만 관심이 있다.
마지막은 첫 장면과 대비된다. 충길은 방문을 열고 아버지에게 다녀온다는 식으로 말한다. 아버지는 자고 있었을 것이다. 충길이 이제 타인의 잠을 깨우는, 꿈을 깨는 역할이 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져서 자신의 꿈을 깨지게 했다. 다만, 그것은 충길의 잠을 깨우는 학교에서 자신의 잠을 깨우는 사람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타인이란 것은 커리큘럼과도 같다. 방학이란 학교의 커리큘럼 상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고, 체육관을 폐지하는 것, 역시 시(市)의 방침상 당연하다. 3명도 유지하지 못하는 체육관이 시의 세금으로 운영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학이란 체육관의 폐지와 같은 것이라면 충길은 지금 레슬링의 방학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방학이란 영원하지 않다. 그의 시작과 마지막이 같듯이 그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해가 뜨고 지듯이 달도 뜨고 진다. 그런 흐름 안에서 충길은 부서질 것이고 다시 건축될 것이다.
여기서 달빛이란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기이자 그 인물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행동을 막는 동기이기도 하다. 햇빛은 레슬링 부를 폐지할 것이다. 그것이 유익하니까. 그건 레슬링 부원들 모두 아는 일이다. 그들도 그들이 무엇인가를 이길 수 있다고 다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면서 묫자리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은 없듯 그들도 폐부 될 것만 생각하며 레슬링을 하지는 않는다. 내일 해가 뜨는 것이, 달이 뜨는 것이 무엇이 중한가? 오늘 뜬 달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것이다. 왜 내일의 해와 달을 언급하려 하는가.
물을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왜 하냐’, ‘무슨 의미가 있냐’, ‘무슨 도움이 되냐’라는 물음은 결론적으로 ‘왜 사냐’는 식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왜 사냐’는 물음은 참으로 무익한 말이다. 아니, 유해한 말이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의미란 계속 물을수록 무의미해진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 말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또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머리를 진흙에 처박는 사상가들이 있다. 이는 깊이나 철저함의 표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지하인들이다.’ 이 말은 많은 해석을 낳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을 따르겠다. 여기서 진흙이란 근거를 뜻한다. 그래서 깊이나 철저함이란 근거가 얼마나 탄탄한 것인지 혹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를 뜻한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지하인들이란 근거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면 근거에는 근거가 없고 바닥에는 바닥이 없기 때문이다. 법치국가는 헌법을 근거로 돌아가지만, 헌법은 무엇을 근거로 만들었는지 물어보면 난감해진다. 일종의 도그마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라며 사람은 욕망의 강도를 알 수 있을 뿐, 욕망의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해란 하고자 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의 영역이 아니라 몰(沒) 이해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고 있는 자신이 대답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질문은 그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가치인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평소에는 이런 답 없는 질문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작가 제임스 서버는 ‘어떤 생각이든 1시간 정도만 해도 혼란과 불행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이 생각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서 모든 물질은 무질서(혼란)로 증가한다고 한다. 그 물질 속에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속에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의미를 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차피’, ‘결국엔’이라는 말로 끝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가치는, 의미는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구하고자 하는 순간의 것이다.
영화는 끝까지 충길이 왜 레슬링을 하는지 본인 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돈 벌려고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분풀이이지 의미의 이유는 될 수 없다. 충길은 아는 것이다. 레슬링을 할 때에만 레슬링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게다가 이유를 생각하면서 레슬링을 하는 것은 걷는 것을 생각하며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생각하기보다는 행동해야만 하는 것을. 말할 수는 없어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돈이 되거나 혹은 이력서에 몇 줄을 더 쓰거나 이런 종류의 일들은 이득을 염두에 두고 일해야 버틸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하는 행동 중 거의 대부분이 돈을 쓰는 일인 것을 알면 그 반대인 돈을 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을 쓰는 일을 전제한다. 쓰지 않는다면 벌 이유도 없다. 충길이 레슬링을 하는 것은 의미를 버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를 쓰게 하는가. 그것은 일상이다. 일상은 꾸준해서 또 이길 수 없어서 무섭다. 일상은 뒤에 시간을 엎고서 매일매일은 철에 드는 녹처럼 삶을 갉아먹는다. 그렇게 일상에 먹힌 사람들은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관성으로 산다.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발을 디딜 수 없는, 그래서 안정된 것이란 없는 무중력 상태에서 엔진이 작동하지 않아도 나아가는 우주선처럼 살아간다.
다시 돌아가서 왜 하는가. 그것은 무익한 질문보다 유해한 질문이다. 그러나 모든 유익은 유해를 전제로, 과정으로 성립된다. 그리고 의미를 얻은 사람은 의미를 간직하지 않고 매일 다시 발명한다. 모든 의미는 시간과 같이 가버린다.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듯 삶도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충길은 관성으로 살지도 습관으로 살지도 않는다. 그는 그의 삶을 근거로 산다. 성공이나 돈이 근거가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돈이나 성공은 숫자로 표시된다. 그 체감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는 시간과 같이 순간을 망각하게 한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내면을 바라본다. 거울을 바라본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사람은 영원을 둔 시간을 이기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는 시간이 답이라는 묘한 탄식과 함께 자신을 시간으로 던지게 한다.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늘어나서 모든 것이 무질서로, 영원으로 흘러간다. 의미도, 삶도 시간 속에 있기에. 영원 속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인다. 죽음이라는 영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을 토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충분히 공감할 만한 발언이다. 그리고 감정은 순간적이다. 순간을 기억하는 것. 간직하는 것도. 시간과 정정당당히 싸우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을 이기려면 일단 같은 링에 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시간 앞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던 진시황은 끝에 가서 묫자리를 걱정하다가 죽었다. 삶이 영원하지 않은데 왜 영원을 구하려고 하는가. 한 개의 거울로 뒷머리를 보는 것처럼 어리석고 불가능한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숫자 앞에 사람은 없다.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 충길이 몇 번씩 지고, 깨질 것을 알아도 사진을 보며 ‘쎄이야’를 계속 외치는 방법론과 마음이, 사람이 시간을 이기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삶이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