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랑 Jun 07. 2019

실패, 삶의 은혜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 발췌, 알랭 드 보통.

  그래, 실패란 이런 것이다. 주요 특징이라면 침묵이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고, 불러내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일도 전혀 없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실패를 엄청난 재난 같은 모습으로 상상해왔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실패는 사실 겁먹은 무위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든 것, 심지어 굴욕에도 익숙해진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 나쁘지 않게 보이는 습성이 있다. 

  그는 이미 특별한 이득도 이렇다 할 결과도 내지 못한 채 삶의 은혜를 너무 많이 써버렸다. 세상에 온 지 수십 년이 흘렀건만 단 한 번도 땅을 일구거나 배고픈 채 잠들지 않았으며 잘못 자란 아이처럼 자신의 특전을 대부분 손도 대지 않고 방치했다.

  사실 한 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또 한 명의 루이스 칸이나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나 제프리 바와가 되려 했다. 새로운 종류의 건축을 탄생시키려 했다. 지방 특성에 맞고, 우아하고, 조화롭고, 기술적으로 첨단이고, 진보적인 건축을.

  대신에 그는 사실 창고 이상의 어떤 건축물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2급 도시 설계 회사의 거의 파산한 부사장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인류에게 그런 열정이 내장된 데에는 분명 진화상의 이점이 있다. 부지런함은 우리에게 도시, 도서관, 우주선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서 몇몇 천재가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범인들이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린 덕분이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66p.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