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산업화 과정을 중심으로
1950년 6월 25일 그 잔혹한 탱크가 밟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황폐한 땅과 그 위에는 우는 아이뿐, 시간이 흘러 2024년 10월 10일 우는 아이가 있었던 그 땅 위에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이 휘날렸다. 불과, 전쟁이 끝난 지 72년 만에 다시 한번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 냈다. 한국은 모든 개발도상국들의 로망이자 이상이 되었다. 전쟁 이후 가장 빨리 성장하여 자신을 지배하던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이 이토록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인물을 꼽는다면 모두가 한 입을 모아 부를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의 아버지요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로다” ‘박정희’ 항상 두 수식어가 그를 서술하는 데 끊이지 않고 따라붙는다. 무작정 박정희의 경제 정책을 찬양하는 자와 무작정 박정희를 독재자로 치부하는 자, 그 사이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한 이를 넘어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가, 지금부터 서술해 보록 하겠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어떠한 경제 발전을 하였기에 이렇게 발전하였을까,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박정희는 반공과 경제 발전을 내세우며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이 경제 발전을 목표로 총 4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진행하였는데, 1~2차 경제 개발 같은 경우에는 기술과 자본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수출 경제력을 높이기 위해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저임금 저곡가를 필두로 정부 주도 경공업 중심 수출을 진행하였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농촌과 도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하여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개발 자금을 위해서 한. 일 협정을 통한 수교와 베트남에 군을 파병하고, 파독 노동자(광부, 간호사)들을 보내어 외화를 벌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경제의 기틀을 닦게 되었다.
3~4차 경제 개발의 경우에는 경공업으로 얻은 자본을 바탕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대성공을 거뒀다. 결국 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의 쾌거를 이루었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1년 100달러 미만에서 1995년 1만 달러를 넘어섰다. 같은 기간 제조업 비중은 15% 미만에서 30%로 늘었고, 수출 비중은 1% 미만(4,100만 달러)에서 28%(1,250억 달러)로 급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나라들이 전후 경제를 재건하거나 식민지 및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추친했지만, 우리나라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러한 경제 개발 중에서 그리 좋지 못한 선택을 하게 된다. 때는 1971년 7.4 남북 선언이 발표되자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반공의 명분이 약화하기 시작되었다. 또한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고 남북 대화를 뒷받침한다는 명목으로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유신 헌법은 통일 주최 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6년이나 연장하며 대통령의 출마 횟수를 무제한으로 하였다. 또한 대통령은 국회의 재적 인원의 3분의 1을 추천할 수 있었고, 대통령의 판단하에 국회를 해산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국정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를 선포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 정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법원장 및 헌법위원회 위원장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신 헌법은 삼권 분립의 원칙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의 기본 정신을 위배하는 헌법이다. 이러한 부당하고 부정한 권력으로 1973년 일본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던 김대중을 납치하는 등의 야당 탄압을 심화하였다. 그러나 결국 1979년 암살당하며 박정희 정부는 막을 내렸다.
이처럼 박정희는 놀라울 정도로 대한민국을 발전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민주 정신을 훼손시켰다. 독재는 어떠한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더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된다. 또한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무엇보다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국민들의 두 손으로 뽑혔으며,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 국민들을 되레 생각하지 않고 손해를 입힌다면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것은 잘못된 것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이끌고 경제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민주적인 절차로서 진행되어야 하고 그래야 한다. 민주 국가이며 민주주의로 인해 선출된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해 국가 단위의 경제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집권이 필요하며 민주적인 절차보다는 강력한 철권을 앞세워 강하게 추진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이에 대해서 많은 이가 동의한다. 실제로 한국방송공사- 조사에 따르면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제한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당시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어느 정도의 독재는 불가피했다’가 61.2%. ‘경제발전을 빌미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제한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가 33.9%였다. 즉 박정희의 그런 독재가 지금의 우리가 잘 살 수 있게 된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경제 성장이 복만 있었을까? 지금부터 신화 속에 가려진 경제 성장 과정 속의 문제점과 현재까지 끼치는 문제들에 관해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1~2차 경제개발 계획의 문제점
박정희는 이러한 경제성장 계획을 통해 고도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여러 구조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우선 앞서 설명했다시피 1~2차 경제 개발을 하며 저임금 저곡가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배고플 밖에 없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한 것들이 무시당하며 그로 인해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나는 등 문제점이 일어났고 또한 이촌향도(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로 인해 서울에 판자촌이 계속해서 커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빈민층에게 살 집을 준다고 말하며 다시는 서울로 이사 오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경공업에만 집중적인 투자를 한 탓에 산업 각 분야에 고른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또한 과도한 대규모 외국 자본 유치로 외채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외국 자본의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1969년에는 경공업 제품의 수출 부진과 외채 상환 시기가 맞물리면서 경제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3~4차 경제개발 계획의 문제점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변화시키며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수출 성과를 이루어내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은 여러 차례의 경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 시기 한국은 높은 석유 수입 의존도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78년에는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는 가운데 한국은 중공업에 과잉 투자하여 국가 재정이 악화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외채가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중공업의 성장둔화는 기업의 도산과 실업률의 증가로 이어졌으며, 성장률도 하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 물가는 더욱 치솟았고 국제 수지 적자도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3~4차 경제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기업들의 숫자와 규모가 점차 들어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금융 수요 또한 증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 수요를 한국의 제도화된 금융기관이 뒷받침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기업들은 사채를 빌리게 되고 그중 부실기업들도 속출되며 그 부실기업은 계속해서 사채를 빌리는 등의 사태에 이르자 박정희 정부는 기업들의 사채를 일정 기간 갚지 않게 하는 8.3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런데 그 돈의 대부분은 국민들의 돈이었고 이 때문에 국민은 크나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또한 오일 쇼크가 73년, 78년에 터지며 대한민국의 경제 시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제 불안 증세가 이어지다가 1977년 IMF가 터지며 대한민국의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문제는 그 당시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 그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출. 내수 양극화
박정희 정부 시절 1~2차 경제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수출 주도형 성장을 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은 현 대한민국의 수출과 내수 사이의 양극화를 불러일으켜 왔다. 수출은 2002년 이래 계속해서 높은 증가세를 지속하고 있으나 민간 소비와 설비투자는 2003년 이후 부진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고용 및 소득 양극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 부문에서 방출된 노동자들이 자영업 부문을 흡수되며 자영업의 과잉 공급과 생산성이 하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은 임금노동자들에 비해 자영업자의 실질소득을 감소시키면서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또한 IMF 이후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 형태의 탄생으로 불확실한 취업 문제를 야기하며 국민들의 생활을 위협했다. 또한 현재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고용 불안으로 인한 과도한 스펙 쌓기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1980년의 마이너스 경제 성장
1970년대 말 우리 경제가 악화하였다. 경제성장률은 1963년에 급등한 후 1970년대 중반까지 평균 10%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78년에 10%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1980년에는 -6.2%를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오일쇼크와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인해 불안해진 정국 80년 냉해로 인한 농작물 수확 감소를 꼽고 있는데 정리하여 해외 요인, 정치적 요인, 자연 요인 등이 마이너스 요인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9년 이전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질 수출 증가율이 1976년에 43%에 달하였으나 그다음 두 해에는 26%, 18%로 떨어졌고 1979년에는 -3.8%로 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한국 수출의 경쟁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대만, 홍콩 등 수출 상품 구성이 한국과 유사한 6개국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970년대 말에 상승한 것을 확인해 보면 한국 수출의 경쟁력이 약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그렇게 칭송하고 숭배한 그 경제 성장의 결과는 허울뿐이었다. 물론 우리가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고용과 소득이 양극화되었고 수출 내수의 양극화 또한 심해져 계속해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즉 박정희의 독재로 인한 경제 성장은 그 과정에서든 이후에서든 그리 좋다고만은 판단 내릴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놀라울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기에 독재는 타당하다는 식의 말은 조금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는 과도하게 결과 우선주의적 태도이며,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가 만약 2차 세계 대전에 성공하여 독일을 세계 제일 국으로 만들었다면 그 과정 속에서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하여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박정희의 산업화를 보며 사람들은 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신화를 읊는다. 그러나 그 신화 속의 껍데기 속을 보면 텅텅 빈 조개나 다름이 없었다. 민주화를 포기하며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경제를 끌어올렸지만 결국 지금의 한국 사회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 올바른 경제화라는 것은 결코 민주화가 바탕이 되어있지 않을 때 가능하지 않다. 여러 사람들과 논의하며 미래에 대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야기할 때 비로소 올바른 산업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의 경제 정책과 민주화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래도 그렇게 독재했으니까, 우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거라며 그를 칭송한다. 그리고 그가 행하였던 독재로 인한 수많은 피해를 지워낸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 과정에 상당히 많은 문제가 숨겨져 있었고, 이렇게 성장한 경제는 많은 불평등과 문제점을 낳았다. 우리는 항상 ‘빨리빨리’ 외쳐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달려오며 우리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한국은 급속도로 빠른 경제 성장을 했지만, 그 속에서 놓쳐 버린 소외자들이 생겨버렸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여러 문제점을 생각하며 하자고 하는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경제의 고속성장과 선진화 - 유정호
한국경제의 양극화 원인과 영향 및 정책과제 - 하준경
박정희정권의 산업화전략 선택과 국제 정치경제적 맥락 - 류상경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 - 임혁백
박정희 시대 연구경향과 재조명 - 김갑식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click 경제교육 / KDI 경제교육 정보센터
https://eiec.kdi.re.kr/material/clickView.do?click_yymm=201002&cidx=1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