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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Feb 07. 2024

어디로 빠져드는지 모르는 채

제주도를 떠났더니 바다에 가까워졌다.

휴가 결재 버튼을 누르지 못해 임시저장으로 묵히는 내가 싫다. 사회생활이 7년이 되어 가는데 첫 직장에서 든 버릇이 문제다. 같은 노비여도 대감집 노비가 좋다고 공기업으로 이직한 지 1년인데 내 마인드는 여전히 소작농이다.


마음속으로는 올 초부터 그만두겠다 마음먹었다. 몇 달 동안 이력서를 써보았지만 서류전형이 통과해도 바로 내일 면접 보러 오라는 말에 몇 번을 포기했다. 서울이었으면 반차라도 쓰고 갈 텐데 아쉬운 마음에 애꿎은 항공권만 검색한다. 이렇게 육지와 섬의 거리가 멀었던가.


남들은 제주도로 떠나지 못해 안달이다. 이직에 성공을 축하받으면서 지겹도록 가장 많이 들은 말


어머, 제주도가 직장이면 여행하는 기분이고 좋겠어요.


 오랫동안 잊고 지낸 고향 집을 방문하는 재일교포 같은 마음이었다. 직장에 대한 설렘은 있어도 제주라는 장소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내 나이를 딱 반으로 나눠 제주와 서울에서 살아왔지만 서울에서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넓게 보고 크게 자란 만큼 다시 돌아와 직장생활이 편하리라 생각했다.


전공을 바꾸느라 늦게 일을 시작하고 번아웃 때문에 2년 동안 경력이 단절된 시간을 보내면서 항상 불안했다. 팀장이 나보다 나이가 어려 불편해하는 걸 느끼면서 같은 시간 동안 효율을 높이는 게 최선의 노력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일상생활이 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나는 시작이 늦었으니까 빨리 따라잡아야 해’라고 누가 재촉하지도 않았지만 엄격한 잣대를 스스로 들이댔다.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제주행은 직급과 월급이 높아졌기에 늦깎이임을 감출 수 있는 기회이다. 그렇게 바라던 기회를 잡고도 나는 서울로 가지 못해 안달이다.


조직의 미묘한 문화적 차이는 제주도 사람인 나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 집 건너 아는 사이여서 원칙이 적용되기 쉽지 않은 지역사회였다. 내 업무는 복지기관을 설립되도록 돕는 것인데 위험 상황이 발생하면 이용자가 빠르게 대피하도록 소방법에 맞추어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팀장은 담당 공무원에게 서류를 제출해 보고 조치가 들어오면 그때 가서 리모델링을 하자고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 나를 융통성 없는 고집쟁이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아는 사이이기에 쉽게 넘어갈 줄 았았던 팀장의 예측은 틀렸고 시간과 돈이 두 배로 들게 생겼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꼼꼼한 성격이어서 상사들이 내게 적당히 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게 난리이니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소심한 복수를 계획한다. 올해 남은 연차 5개를 여름휴가로 신나게 다녀오자마자 퇴사의사를 입사 11개월 차에 밝혀 회사를 생각해 주는 척 연기하기로 한다. 그리고 입사 1년이 되자마자 생긴 연차 15개를 싹 다 버리고 회사를 나가는 시나리오이다. 20일을 월급루팡으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왠지 고소하다.


과거의 나는 직장에서 ‘자기만 아는 직원’으로 입에 오르내리기 싫어서 인수인계할 시간까지 고려해서 퇴사 스케줄을 잡았다. 앞으로 보지 않을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여름휴가 전에 통보하는 건 너무 싹수가 없어 보일까 봐 다녀와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휴가결재를 받는다.


“주임님은 여름휴가 어디로 가요?”라는 팀장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동문서답하며 웃어 보인다.


휴가 끝나고 뵙겠습니다.

어디를 가든 말든 알아서 뭐 하실 건데요. 제가 알아서 잘 놀고 올게요. 여름휴가 5일을 꽉꽉 채워 갈 만한 곳으로 보라카이가 당첨되었다. 갑작스럽게 가게 된 만큼 본전을 뽑아야 할 거 같은 기분이다. 일정을 담당한 친구 K는 작년에 경험한 스쿠버다이빙이 재미있었다며 내게 체험해보게 하고 싶다고 한다. 4박 5일을 호핑투어, 스쿠버 다이빙, 프리다이빙으로 꽉꽉 채워 매일을 물에 담그는 일정을 배치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닷물의 짭짤한 기운이 몸에 닿는 게 싫었던 나는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흥미가 없다. 그저 호텔 수영장에서 둥둥 떠다니고 싶지만 혼자 여행이 아니기에 분위기를 맞춘다. 스쿠버 다이빙은 잠수복을 입고 무거운 산소통을 짊어지고 들어가야 한단다. 깊숙이 내려가면 다양한 물고기도 볼 수 있고 숨도 편하게 쉰다고 들떠서 말하는 K에게는 미안하지만 상상만 해도 안 그래도 없는 체력이 빠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합의를 통해 이틀 동안 프리다이빙을 하기로 했다.     

이효리 망고CF로 유명한 푸카셸비치(Puka Shell Beach)는 보라카이 주민들도 즐겨 찾는다.




제주도 사람이지만 어려서부터 바다를 싫어했다.

피부에 달라붙은 소금기 마치 잘 절여진 간고등어 같아서다. 도시사람이라는 로망이 있었던 나는 따가운 햇빛에 까맣게 익어가는 피부가 ‘나는 촌년이에요’라고 대변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보라카이 바다는 달랐다. 바닷물은 발가락을 비출정도로 투명했고 생선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왠지 바다가 좋아질 것 같다. 생선 지느러미 같이 생긴 롱핀이라는 오리발을 신고 얕은 바다에서 교육을 받는다. 두발이 속박되어 마음대로 걸을 수없어서 의지와 다르게 헤엄치게 된다. 오른쪽 다리를 내리고 왼쪽 다리를 올리며 피닝영법이 어색하다.


제주사람이지만 생전 처음해보는 바다 다이빙


1분 30초 동안 수면에 몸을 띄워 숨 참기를 한다.

어릴 때 친구들과 숨 참는 놀이를 해본 뒤로 처음이다. 얼마나 지났을지 궁금한데 일어 설까 말까 생각하는 차에 강사가 통과했다고 말한다. 그다음은 다리에 힘을 주고 제법 멀리 헤엄을 쳐본다. 살짝만 힘을 줘도 돌고래처럼 쭉쭉 물살을 시원하게 가른다. 배를 타야 하는 거리로 보이는데 어렴풋이 보이는 섬까지 피닝으로 가자는 선생님 말에 얼어붙는다. 허벅지가 버텨주길 바라며 악착같이 헤엄치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린다. 우중헤엄이라니 보라카이에서 여름휴가가 아니라 해병대 하계훈련이다. 쏟아지는 비로 복잡한 수면과 달리 물속을 아름다웠다.


니모 물고기로 잘 알려진 흰동가리를 비롯해 다양한 생명체들을 구경하며 헤엄쳐 뭍으로 나온다. 뿌연 제주바다로만 생각했던 나는 맑고 역동적인 보라카이 바다를 통해 갇혀있음을 알게 되었다.




숨을 참으면 참을수록 깊이 닿는 프리다이빙처럼 회사에서의 내 노력도 그렇게 인정받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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