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성장

by 최윤형

시간이라는 약은 약국엔 없다.


지난날을 회상하면 대부분의 일들이 그저 그랬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때는 나름 힘들었다고 여겼던 순간도 지금 와서 보면 "그래도 괜찮았지", 혹은 "나쁘지 않았어" 정도의 말로 정리된다. 마치 모든 감정이 시간 속에서 희석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본다. 시간이 지나 모든 게 무뎌지는 것이, 과연 우리가 그 문제를 진짜로 해결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단지 망각이라는 이름의 평온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신적인 상처가, 육체적인 피로가, 단지 시간의 경과만으로 자연스레 치유된다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한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어른들의 핑계처럼 느껴졌다. 내 감정과 아픔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시간이 그것을 해결한단 말인가.


군 복무 하면서 남은 날들을 손꼽아 세며 생각했다. 200일이 남았든, 150일이 남았든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오늘도 나는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내일도 그럴 거라고. 그런 식으로 나는 내 가능성과 변화의 여지를 스스로 닫아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나는 결국 깨달았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오늘 하루를 살면서 마주친 누군가의 말 한마디, 우연히 본 책 한 줄, 지나가듯 들은 노래 한 곡이 삶의 결을 아주 미세하게 바꿔놓는다. 그리고 그 미세한 결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전혀 다른 나를 만든다. 이것이 성장이다. 격렬한 변화가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일상이 만들어낸 새로운 나. 그 성장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질문과 마주한다. 이제는 이 익숙함을 버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까? 아니면 이 결에 안주해도 될까? 그 고민의 끝에서, 나는 다시 성장의 기회를 찾는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 번의 시간의 흐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훌쩍 몇 년이 흘러 있다. 나도 모르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되어 있다. 누군가는 나이 든다는 것은 시간의 속도를 빠르게 만든다고 말한다. 예전엔 하루가 길었는데, 요즘은 한 달이 훌쩍 지나간다며 놀란다. 사람들은 흔히 열 살의 아이가 느끼는 1년과 스무 살의 청년이 느끼는 1년의 길이는 다르다고 한다.


왜일까?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철학적인 물음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답을 삶의 무게감에서 찾고 싶다. 어릴 적에는 하루를 온전히 내 것처럼 살았다. 놀고, 배우고, 실수하고, 울고 웃으며 내 하루를 채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 하루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책임이 생기고, 의무가 생기고, 누군가를 위해 써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무게감은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중력을 높이고, 그에 따라 시간도 더 빨리 흐르게 만든다. 삶이라는 행성 위에서, 우리는 점점 더 강한 중력 속에 살아간다. 청소년기에는 자유로웠던 몸과 마음이, 성인이 되어가며 점점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 무거움은 단지 짐만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의 무게이자, 동시에 의미의 무게이기도 하다.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는 하루, 그런 하루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 무겁지만 깊이 있고, 벅차지만 단단한 시간.

그래서 나는 이제,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란 걸 안다. 시간은 무조건적 치유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내는 과정의 이름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몸부림. 무거운 과제를 하나씩 등에 짊어지면서도 결국 끝내 해내려는 몸짓. 그 모든 순간이 '성장'이고, 그 모든 시간이 곧 약이다. 어떤 날은 그 무게가 너무 버거워 숨이 차기도 한다.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에도 시간은 우리를 놓지 않는다.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앞에 찾아와, 어제보다 나은 선택을 해보라며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오늘도 살아간다. 어쩌면 시간은 약이 아니라,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어 주는 존재. 함께 나이 들고, 함께 무뎌지며, 함께 성장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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