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영범이 엄마는 자기 아들과 소위 급이 맞지 않는다고 영범과 금명의 결혼을 반대하고, 결국 금명이 엄마 애순에게 말한다.
“제가 속 마음을 말하지 못하면 죽는 병이 있어요. 이 결혼 말려주세요. 결혼은 맞는 집안끼리 섞여야 탈이 없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그늘없이 키운거 같으시죠? 근데 그런 집 없어요. 어려우면 어떻게든 그늘 들지 양지에서 큰 나무랑 같겠어요? 그래도 말을 하니까 이제야 제 가슴을 짓누르던 돌을 내려놓는 것 같네요.“
영범이 엄마는 그 돌을 애순과 금명에게, 나아가 자신의 인생이자 걸작인 자기 아들에게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영범이 엄마와 같은 질병, 즉 속마음을 입밖으로 내지 못하면 죽는 병을 앓아 왔다. 타고난 낯가림과 초딩 때부터 배워온 사회성, 직장생활에서 이리 저리 치이고 다구리 당하며 체득한 눈치 덕에 대체로 가까운 이들에게만 질환이 표출된다. 오래된 피해자로는 엄마가 있다(엄마 미안해). 병증이 발현되면 며칠만의 쾌변처럼 사이다성 후련함이 단전 저 깊은 곳에서부터 시원하게 오는데, 그 짜릿한 쾌감은 도파민의 일종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동전에는 양면이 있다. 내가 홀가분해지고자 투척한 똥은 상대가 맞게 되고, 그의 영혼에 낸 생채기는 아무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치명상을 입힌 경우 완전한 치유가 어려워 그 말을 내뱉기 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을 때도 있다.
나는 똥을 던져만 봤지 제대로 맞아본 인상적인 기억은 없었다. 맞았어도 친구 1, 2, 3에게 돌아가며 전화를 걸어 잘근잘근 물고 뜯고 씹는 아가리 난도질을 하다보면 그냥 풀리기도 하고(귀피 줄줄 피해자 친구들 고멘), 중요치 않은 기억의 삭제능력이 꽤 좋기도 하며, 그냥 술 먹고 까먹은 것일 수도 있고,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그렇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마침내. 예상치 못하게 같은 질병을 앓고 있던 환자로부터 폭풍 설사 급똥 대방출 및 그로 인한 찐한 마상을 경험하게 되었다(아름다운 연말에 계속되는 똥썰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할게요). 모멸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졌다. 사람 면전에다 대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걸까.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 같았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병증이 발현되었던 순간 보았던 상대방의 표정들이 스쳐갔고, 비로소 그 의미가 이해가 되었다. 정뚝떨과 동시에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빡치는데 쪽팔리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대체 난 언제까지 성찰하고 성장해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죽는 날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하지 말자. 상대가 긁힐 것이 명백히 예상되는 말을 내지르며 T라서 그렇다고 포장하지 말자. 그건 그냥 싸가지가 없는거다(T발 C인 EQ력 고자라면 그냥 해라. 어차피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조금만 더 다정하자. 곡해 말고 선해 하자. 불치병이 아니라 믿고 치료를 해보자. 일단 엄마한테 친절한 딸이 되자(계속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름 착한 딸임.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임).
이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번 새해 다짐은 작심일년이 되도록 실천해보자.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나의 지인들은 혹여 나의 병증을 적발하게 된다면 주저하지 말고 즉시 싸다구를 날려주자. 이 의지박약자야 정신차려!
주저리 주저리 구구절절 적어 놓았는데, 하여간 요지는 말로 두들겨 맞아서 맴이 심히 안 좋았고, 그 계기로 부끄러운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으며, 앞으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새해 다짐을 한다는 어느 초딩의 일기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