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 Nov 16. 2024

영화관이라는 토끼굴 -영화 <와일드 로봇>

영화 <와일드 로봇>


한참 동안 벼르던 영화 <와일드 로봇>을 봤다. 영화 보는 걸 미뤘던 이유는 시간 때문도, 영화에 대한 의심 때문도 아니었다. 일부 ott에 이미 영화가 올라와 있었기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와일드 로봇>을 극장에서 보기로 한 건 화면비나 사운드, 혹은 영화에 대한 순결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넷플릭스에만 올라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장면들로 가득한 데다 영화적 구성도 탄탄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감성 한 스푼, 원령공주식 미래 원시물 한 스푼, 어딘가 익숙한 구성이지만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을 모티브로 한 구성 자체가 원형적이다. 원형의 변주로 몰입과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우린 그걸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영화에 대한 논평은 차치하자. 영화의 만듦새를 따지는 걸 무력하게 하는 감동이 너무나 강력하니까. 터져버린 눈물에 비평적 시선은 어느새 잃어버렸다. 다만 그 감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ott에서 봤다면 이 만큼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영화의 완성은 정녕 극장이란 말인가.


단언할 수 없다. 답은 기다, 아니다가 아니라 아닐 이유가 없다로 해야 한다. ott가 현대 기술의 최전선이기에 감성주의자들에게 과하게 공격받는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돌이켜보면 VHS로 봤던 <인생은 아름다워>나 <타이타닉>도 평생 기억에 남을 감동을 주었다. 그것들을 영화관에서 봤다면 더 감동을 받았을 거라고? 아닐 이유가 없다. 당연히 극장에서 봤으면 감동이 더 컸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필수 요소는 아닌 것 같다. vhs로 보든 ott로 보든 심지어 비행기 기내 영화로 보든 이런 류의 영화는 분명 감동을 준다. 극장과 극장이 아닌 상황을 실험실처럼 동시에 체험하지 않은 이상 분명히 비교할 순 없다. 그저 경험적으로 추측할 뿐. 나중에 극장에서, 혹은 ott로 다시 본 경험으로 비교하는 건 불완전한 결론일 뿐이다.


생각해 볼 만한 건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극장이 아닌 극장에 들어가는 행위 그 자체이다.


영화가 명작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영화든 극장 출입은 그 자체로 특별한 행위이다. 종종 극장이란 게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상한 나라는 극장이고 앨리스는 관람객이다. 앨리스처럼 관객은 정해진 시간에 쫓겨 토끼굴로 들어간다. 토끼굴이란 게 무엇인가, 세상에는 흔적으로만 보이는 곳이지만 거대한 세상의 입구이다. 굴에는 햇볕이 들 구석이 없다. 그렇지만 굴 안에만 들어서면 수없이 화려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극장은 어떤가, 고층 건물 꼭대기 층들을 쓰지만 희한하게도 창문은 없다. 높은 곳에 올라갔는데 꼭 지하에 숨은 것만 같다.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을 체험하는 아이러니.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간 순간 세상에서 앨리스가 사라져 버렸듯이 극장에 들어간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영화 속 세계에 대신 들어간다는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물리적으로 깜깜한 곳에 숨겨져 버린다.


토끼굴 안으로 들어간 앨리스가 깊고 깊은 곳에서 떨어진 후 바닥에 부딪혔는데도 아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토끼굴 속 세상은 물리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몸이 커졌다 작아지고, 수없이 긴 티타임을 의심 없이 즐긴다. 극장도 마찬가지다. 총을 맞고 칼에 찔리고 차가 데굴데굴 굴러도 고통은 없다. 외부의 시선으로 내부를 즐길 뿐. 고통의 이미지만 갖고 고통을 즐길 뿐. 앨리스도 어쩌면, 1인칭 소설이지만 실상은 3인칭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떤 영화들은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제거되는 행위를 통해 완성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홍상수의 영화이다. 홍상수 영화는 리얼리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플롯의 시간 구조를 뒤죽박죽 섞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그건 바로 술에 취하거나 꿈을 꿀 때의 느낌이다.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오면 모험을 끝내고 세상으로 돌아온 앨리스처럼 세상에 대한 감각이 흐트러진다. 굴속이 현실인가 바깥이 현실인가. 좋은 영화는 그 사이를 교묘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 맞은편에는 <와일드 로봇>이 있다. 대명사로 둘 정도로 이 영화가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이런 류의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1-2시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 동안 긴 세월의 정서를 빚어내는 작품, 소설로 치면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스크루지의 하룻밤이지만 일평생이 담긴 그런 얘기들. <와일드 로봇>도 짧은 시간 동안 인류와 사랑이라는 큰 역사의 이야기를 한 인물의 일대기로 훑는다. 이런 영화를 볼 땐 세상에서 잠시 지워져야 한다. 그리고는 극장 밖을 나설 때 어느새 온전히 바뀌어버린 세상을 마주하는 그 벅참을 느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케이팝의 시대에 제이팝을 외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