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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커밍아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콜턴의 커밍아웃〉 리뷰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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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기고 부유한, 운동선수 출신의 섹시한 백인 남성이 커밍아웃을 한다. 물론 가진 자의 커밍아웃이라고 해서 그 의미가 퇴색하는 건 아니다. 그가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게이 문화에 거리감을 느끼고 결혼과 입양을 꿈꾼다는 것, 즉 그가 규범적 욕망을 체화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비판의 이유가 될 순 없다. 문제는 왜 수많은 커밍아웃 서사 중 콜턴의 서사가 선택되었느냐는 점이다. 만약 그가 유색인이거나, ‘문란한’ 게이 라이프를 사랑하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냄새가 날 것 같은 가난한 집에 살거나, 커밍아웃을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외로운 퀴어였다면 그의 커밍아웃 서사가 이토록 ‘감동적’이었을 수 있었을까? 왜 굳이 이성애자가 아니란 것 빼고 모든 것을 가진 남자의 서사가 ‘또다시’ 나와야만 했을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콜턴의 커밍아웃〉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콜턴은 이성애 남녀를 짝지어주는 리얼리티 쇼인 〈베첼러〉에 출연한 적이 있다. 심지어 가장 가깝게 지내던 여성 한 명을 위치 추적하는 등의 스토킹 행위로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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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누군가는 왜 콜턴이 스스로가 게이인 걸 알았으면서도 굳이 〈베첼러〉 같은 프로그램에까지 나가 여성 출연자에게 집착했느냐고 의문을 품거나 그를 비난할 것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콜턴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때때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곤 했기 때문이다.


이성애 남성들이 자신의 성 경험을 떠벌리며 으스대는 자리(주로 또래 고등학생이나 군대 선후임과의 대화)에서 게이인 나는 내 섹스 상대를 여성으로 바꾸어 그 대화에 끼어든 적이 많다. 남들에게 내가 이성애자처럼 보일 수 있도록 남성성을 과잉 수행한 것이기도, 질 낮은 이성애 남성성에 지고 싶지 않은 괜한 열등감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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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자신을 부정하고 남을 속이는, 무엇보다도 그럴 만한 필연적 이유가 없는 짓을 계속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행동을 멈추지 않고 반복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부터 관성이 생긴다. 나도 나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는 내면의 비난을 끝없이 마주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멈추지 못한다. 나는 〈콜턴의 커밍아웃〉에서 논의되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멈추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1차적으로는 콜턴의 외모를 '감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했던 건 당사자인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게이의 비합리적 행동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적어도 내게는, 이성애자들이 자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할 수 있는 커밍아웃 서사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더 갈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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