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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Apr 05. 2022

만우절 즈음의 장국영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리뷰

  


  만우절 즈음이면 늘 장국영 기사가 나온다. 일 년에 한 번 거짓말이 허용되는 날,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난 배우를 향한 추모는 나를 포함해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장국영의 영화를 보기 전에는 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배우가 계속 소환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만우절에 적당한 기삿거리라고만 생각했다. 기자들은 늘 그럴듯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니니까 장국영만큼 좋은 소재는 없었을 거라 짐작한 것이다. 내가 완전히 틀렸음을, 장국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배우임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만우절을 낀 주말, 영화관에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하 〈패왕별희〉)을 봤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러닝타임이 3시간에 달한다면 관객의 집중력이 잠깐이나마 흩어지기 마련이다. 모든 장면에 공감하며 몰입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하지만 〈패왕별희〉는 다르다. 적어도 내게 이 영화는, 시작 5분 만에 완전히 사로잡아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주의를 흩뜨리지 ‘못하게’ 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장국영이 있다. 아직 장국영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패왕별희〉는 동명의 중국 경극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경극은 진시황 사후 혼란에 빠진 중국을 두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결정적 승기를 잡은 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백미는 항우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의 자결 장면이다. 우희는 쫓기는 상황에서 자신이 항우에게 짐이 되는 것도, 그렇다고 살아남아 유방에게 욕보이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항우와 술을 마시던 도중 검무劍舞를 자청해 춤을 추던 중 자결한다. 우희의 자결은 항우의 쇠락이 자아내는 인생의 무상함에 관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엄청난 무력을 자랑하여 초패왕으로 불렸던 항우가 자신이 그토록 얕잡아보던 유방에게 패배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에 두 연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포개지기도 한다. 영화 〈패왕별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살아남은 이 비극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중국 근대의 여명기를 배경으로 한다. 두지는 홍등가에서 일하는 여인의 자식이다. 두지의 어머니는 더 이상 일터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되자 아들을 경극단에 버리듯 맡기고 떠난다. 아동인권은커녕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시기였다. 두지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매일 두르려 맞으며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시투는 그런 두지와 가까이 지내며 두지가 경극단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친구다. 시투와 두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버티며 훌륭한 경극 배우가 되는 데 몰두하고, 자연스레 초패왕과 우희를 연기하는 배우로 성장한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다. 시투와 두지의 시대가 중국 역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데다가, 비극의 여주인공 우희를 연기까지 한 두지가 얼마나 많은 남성 위정자로부터 성 상납 혹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강요당했는지만 살펴봐도 이들이 지나온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황제를 모시는 내관, 근대 문화예술계의 실력자 원대인, 중일전쟁기의 일본 장교,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의 인민 등 시투와 두지는 세상이 바뀔 때마다 죽지 않고 경극을 이어나가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인다. 이 과정에서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시기에 손 내밀어 서로를 구해주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경극이라는 운명에 엮인 채 패왕과 우희로 살아온 그들은 서로가 없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 시투와 두지에게 서로의 존재는 상상 가능한 삶‧세계의 근원이다.     


  영화는 이토록 단단히 엮인 두 인물의 운명이 시대의 질곡에 의해 거칠게 흔들리는 모습을 비추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시투와 두지가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함께 일궈온 경극이라는 삶‧세계를 영위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우리는 ‘개인의 운명’과 ‘시대의 흐름’이 충돌하며 서로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심코 지나온, 딱딱한 문장으로만 배우는 역사에 깃든 누군가의 피‧땀‧눈물을 떠올리며 역사를 돌아보게끔 해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패왕별희〉의 보편적‧일반적 층위의 감동이다.     



  퀴어 이론‧퀴어 재현 등에 관심이 있는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패왕별희〉가 과연 퀴어영화인가’를 고민했다. 우선 시투와 두지가 서로를 향해 느끼는 감정에 주목해보자. 둘 사이의 감정이 우정이 아닌 사랑임은 분명하다. 시투의 아내 주샨과 두지가 서로의 존재를 질투하며 불안해한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두 남자의 성애적 긴장은 경극단에서 합숙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주샨의 질투와 불안을 통해 시투와 두지 사이의 감정적 연결감이 결코 우정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시투와 두지가 경극 〈패왕별희〉를 대하는 태도다. 〈패왕별희〉는 항우와 우희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즉 이성애에 토대한 극이다. 그러나 시투와 두지는 모두 남자다. 단순히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성 인물을 연기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시투와 두지는 어릴 때부터 항우와 우희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두지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대사를 얼버무려 자신의 성별에 맞춰 바꾸어 말할 때마다 수도 없이 두드려 맞았다. 심지어는 시투로부터도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당한다. 이처럼 엄청난 고통과 고민 끝에야, 두지는 자신이 여자라는 대사를 받아들이고 우희를 연기할 수 있었다. 그에겐 우희(혹은 우희를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 게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희를 연기하다’보다 ‘우희가 되었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반면, 시투는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며, 현실의 삶에 '한눈을 판다'. 두지가 시투에게 분노하는 이유다. 우희가 되어 패왕(시투)을 사랑하게 된 두지는, 시투가 〈패왕별희〉의 바깥에서 또 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걸 견딜 수가 없다. 두지는 목숨이 달린 재판에서조차 경극을 두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일본군 장교 앞에서 경극을 공연한 것이 민족을 반역한 죄라는 추궁에, 시투를 비롯한 두지의 주변 인물들은 두지에게 일본군의 강요에 못 이겨 연기한 것이라 거짓말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두지는 그러지 않는다. 일본군에게 잡혀간 시투를 구하기 위해, 경극의 가치를 알아보는 일본 장교의 진심을 알아본 후에 경극 공연을 선보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두지는 패왕을 지키는 우희의 심정으로, 자기 삶(경극)을 지키는 심정으로 일본 장교 앞에서 우희로 분했다. 그리고 두지의 이런 태도는 위기 때마다 반복된다.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된 경극을 향한 자부심으로 모든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지의 ‘의지’ 문제가 아니다. 두지에게서 삶과 연기,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 모든 혼란이 지나간 후, 두지가 자결로 생을 마감하는 걸 암시하는 영화의 마지막도 이 연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우희와 무대에 오르는 시투를 보며 새초롬한 표정으로 무대의상을 불태우는 두지, 문화대혁명의 광풍 이후 “경극은 이제 끝났어. 아무것도 안 남았어”라고 말하는 두지, 죽음의 위협 앞에 경극‧아내 그리고 자신마저 저버리며 무너지는 시투를 바라보는 두지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결뿐이기 때문이다. 우희가 초라해진 연인 앞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듯, 두지 역시 더 이상 초패왕으로 살아갈 수 없는/살아가지 못하는 시투에게서 쇠락한 항우의 모습을 떠올리고 우희와 같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어’ 우희를 연기하기를 거부했던 어린 두지는 어느새 우희라는 상징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여 영원한 초패왕의 연인이 된다. 그리고 둘의 사랑이 더 이상 가능해지지 않자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세상을 지켜낸다.     



  결국, ‘〈패왕별희〉가 퀴어영화인가’라는 질문은 ‘그렇다’라고 답변될 수밖에 없다. 두지가 수행적(performative)으로 우희와 자신의 삶을 하나로 엮어 살아간 것이 젠더의 구성적 성격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남성 신체를 가진 두지가 (마찬가지로 수행적으로) ‘완전한 우희’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것이 〈패왕별희〉에서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깊은 의미를 품어내는 방식이다. 보통 서구의 퀴어영화가 어느 정도 정형화된 경로를 통해서 자신의 주제를 영상화하는 데 반해, 〈패왕별희〉는 동양의 고전 경극과 근현대 중국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적 배경을 경유하여 가장 탁월한 퀴어영화의 자리에 올랐다. 〈패왕별희〉의 영향을 받은 〈왕의 남자〉가 그러하듯, 이 영화는 ‘좋은 영화’와 ‘좋은 퀴어영화’라는 두 가지 성취를 이뤄낸 영화다. 당신이 재개봉한 〈패왕별희〉를 보며 만우절 즈음의 장국영을 추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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