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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y 31. 2022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감상하는 두 가지 방법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나는 전설적인 포크 가수 정태춘의 음악 여정을 담은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두 가지 방법으로 감상했다. 첫째는 그의 음악을, 생애를, 말을, 시대를 천천히 음미하며 따라가는 방법이다. 촌에서 자란 정태춘은 얼떨결에 서울로 상경해 덜컥 낸 앨범이 성공을 거뒀으나 2~3집은 연달아 실패했다. 그가 조용필과 송골매가 한국 음반 시장을 평정했던 시대, 즉 포크가 방송에 나오기는 영 어려워진 시대인 1980년대에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밤 업소에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노래를 계속 부르기를 택했다. ‘작가주의적 포크가수’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의 음악 여정은 늘 투쟁의 과정이기도 했다. 87년 민주항쟁, 전교조 해직교사를 위한 순회공연, 음반 사전심의 위헌 소송 및 승소, 대추리 투쟁 등 그는 억압받거나 쫓겨날 위기의 사람들 옆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투쟁 현장에서 길어온, 아내이자 또 다른 걸출한 가수인 박은옥의 목소리와 함께 내내 흘러나오는 정태춘의 노래는 그의 음악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진한 울림을 느낄 만큼 좋다. 스토리텔링을 곁들인 콘서트 영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란 소리다).


  영화에는 광주에서 열린 그의 40주년 콘서트 장면이 나오는데, 한 관객이 노래에 앞서 내레이션을 읊조리는 정태춘에게 “난 당신의 노래를 들으러 왔지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냐!”라고 소리를 지른 후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러나 이 얼마나 공허한 항의인가. 정태춘은 오랫동안 자기가 마주한 현실, 자신이 손잡은 사람들에게서 노래를 길어왔다. 그가 오랜 시간 칩거한 이유인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이를 대변한다. 세상과 접촉한 곳에서부터 음악을 만들어왔기에 그 관계성이 흔들리자 창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념’ 없이 노래만 부르라는 관객의 요구는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래에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담기는 게 맞는다면, ‘이념’ 없는 정태춘의 노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정태춘‧박은옥의 이름만 알고 있던 내게 그의 음악 여정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그가 판을 만들고 스스로를 기획하는 과정이었다. 2~3집 실패 후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는 ‘얘기노래마당’이라는 행사를 기획해 소극장 콘서트로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수용하지 않을 때마다 우직하게 자기만의 판을 만들어 예술가로서의 삶을 연장했다. 기회를 잃은 예술가가 위기를 돌파하는 데는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기를 비롯한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정태춘은 여러 대안 중 자신이 하고 싶은 노래를 하기로 정했고 이를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예술가’가 아닌 ‘동시대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노래가 십 대 인권 활동가, 국가대표 운동선수, 루게릭병 환자에게 어떤 울림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흥미롭다. 이 영화는 정태춘을 신화화하여 박물관에 박제하는 대신, 그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판을 꾸준히 만들고 유지해온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울림을 전할 수 있는 ‘현역’ 예술가임을 보여준다. 세상에 환대받지 못할 때에도 우직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하여 끝내 다시 세상이 자신을 찾게 만드는 ‘자기 기획자’로서의 정태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태춘의 음악을 아끼는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기획하여 남에게 보이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도 이 영화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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