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하늘 위에 갑자기 거대한 미확인 비행 물체가 나타난다. 그리고 현재. 영화는 사람들이 UFO와 살아가는 법을 천태만상으로 보여준다. 선형적,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짧은 이야기가 독특한 유머와 리듬감으로 이어진다. 심각하게 볼 필요는 없다.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일반적인 내러티브 영화에 익숙한 관객은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스토리를 이해하려고 보는 것보다 음악 듣듯이 (또는 시를 읽듯이) 감정을 흡수하는 느낌으로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외계인인가? ‘같은’ 인간이라도 그 생활과 내면은 얼마나 복잡다단한가? 다시 한번 감독의 말. “UFO처럼 이 세상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와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모든 캐릭터도 영화를 만드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 이야기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관객도 본인의 삶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의미를 만들기 바란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UFO와 외계인은 맥거핀일 뿐. 우리는 그저 꾸역꾸역 고군분투하며 나아갈 뿐.
H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Spain/2022/67min/국제경쟁
스페인의 산페르민 축제. 이 축제의 백미는 좁은 골목으로 소를 몰아 투우장으로 이동시키는 행사다. 1969년, 이 행사에서 한 남자가 사망했다. 드레스 코드인 흰색이 아닌 파란색 옷을 입은 남자였다. 신분증은 없었고, 소지품은 약간의 돈과 담배 그리고 ‘H’가 적힌 열쇠고리가 전부. 조사 과정에서 남자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수백 명에 대한 심문이 이어진 후에야 그의 신원이 밝혀진다. 죽은 남자는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 감독의 삼촌이었다. 50여 년이 훌쩍 지난 후, 감독은 그날로 돌아가 삼촌이 죽기 전 새벽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영화는 내내 떠들썩한 행사 전날의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의 연속이다. 삼촌의 혼잣말과 시선, 그가 들었을 법한 소리, 곧 있을 죽음과 대비되는 거리의 흥분, 그리고 현실과 죽음 사이에서 삼촌이 생각하고 대화한 것들 등등. 다른 장면은 없다. 1시간여 동안 내내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전개되는 시청각 요소들은 이 감각의 주인이 죽기 전의 삼촌인지, 삼촌의 유령인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자/유렁의 감각에 이입하는 꽤나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화다.
노랑 조끼의 프랑스/A French Revolution
엠마뉴엘 그라스/France/2021/105min/프론트라인
2018년 10월 시작된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의 시작은 유류세 인상이었다. 그러나 유류세만으로는 온 프랑스를 들썩이게 한 이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파리 남서쪽의 소도시 샤르트르에서 노란 조끼 운동 간사를 맡은 한 남자는 자신이 처음에 노란 조끼 운동을 하찮게 봤다고 고백한다.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작’ 유류세 정도의 문제로 운동을 전개하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유류세 인상은 퍽퍽한 삶을 견디던 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하나의 계기, 즉 발화점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다. 운동의 불씨는 이내 빈곤, 자본주의, 마크롱 정권 등에 대한 대중들의 광범위한 분노 전반으로 옮겨 붙었다. 요컨대 노란 조끼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절된 채 존재하던 소외된 자들의 삶 경험이 접속하는 계기였다.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는 개별일 때는 들리지 ‘않는다’. 여럿이 모여야만 청취 가능한 목소리가 된다. 그러나 어렵게 모인 이들의 목소리는 이내 온갖 비난에 직면한다. 기존 사회‧체제의 ‘상식’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손가락질은 곧 운동 참여자들의 내면을 잠식한다. 과격파와 온건파의 대립, 교통 체계 등을 ‘방해’한다는 비난, 운동 조직화의 방향성, 활동가들의 내분과 헌신 경쟁, 소진 등등. 이들은 모두 처음 운동을 촉발한 분노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는 내용물들이다. 활동가, 참가자들은 이내 수치심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패배주의적 정서에 젖어든다.
어딘가 익숙한, 노란 조끼 운동에 한정되지 않는 이야기다. 모든 사회운동, 대중운동이 이러한 순간을 마주한다. 그러나 패배를 기억하되,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노란 조끼 운동은 흐지부지되고 마크롱은 재선에 선공했지만, 노란 조끼 운동의 문제의식은 연금 개혁 이슈에서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매번 꺾이는 듯 보이는 약자들의 목소리는 이렇게 불연속적으로 계승되며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패배주의에 잠식당하지 말고 다음 계기를 치열하게 모색하면 된다. 누군가를 착취‧소진시키는 체제가 존재하는 이상, 이에 반하는 목소리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목소리는 분명 어느 순간에 하나로 모여 변화를 촉구하기 마련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