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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Feb 05. 2024

거장의 카메라는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멈추지 않는다

영화 〈노 베어스〉

8★/10★


  〈노 베어스〉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첫 번째는 이란의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이야기다.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출국금지 상태(이는 영화 속 영화 속 설정일 뿐 아니라 영화 밖 감독의 현실이기도 하다)인 그는 국경을 맞댄 튀르키예에서 촬영 중인 영화를 찍는 중이다. 출국금지 조치로 원격으로 디렉팅할 수밖에 없는 그는 인터넷이라도 끊기면 작업을 이어갈 수 없다. 그나마 촬영장에서 가까운 국경 마을에 머물며 어찌어찌 촬영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감독이 촬영 현장에 없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하고 불편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와 연루되었다가 괜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고, 그의 말과 행동이 마을의 전통과 어긋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파나히가 연출하는 영화의 주인공 박티아르와 자라다. 이들은 영화 안에서도, 현실에서도 유럽으로의 밀항을 꿈꾼다.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이야기 역시 현실에 걸쳐 있다(영화 ‘밖’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라를 연기한 배우 미나 카바니는 노출 연기를 했다는 이유로 포르노 배우로 비난받아 10년째 망명 중이다). 영화 속에서, 박티아르는 자라를 위한 위조 여권을 구하지만 자신의 여권을 구하지는 못하고, 자라는 박티아르를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밀항을 시도하려는 두 사람이 자신의 계획을 파나히에게 밝히자 감독은 이 과정을 촬영하게 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자라의 위조 여권만 구해지자 그녀는 박티아르를 두고 갈 순 없다며 자신이 극 중에서 내린 선택을 반복한다. 그러고는 희망 없는 현실에 좌절해 자살한다.     


  마지막은 파나히가 머무는 마을의 남녀 솔두즈와 고잘 이야기다. 고잘은 마을의 전통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결혼할 남자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다 반정부 시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솔두즈와 사랑에 빠진다. 마을 사람들은 둘의 수상한 기류를 눈치챈다. 그러고는 파나히에게 사진을 요구한다. 틈틈이 마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찍어온 그의 카메라에 솔두즈와 자라가 연인이라는 증거가 담겼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파나히는 자기 카메라에 두 사람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고 거듭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심지어 코란에 손을 얹고 맹세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세 이야기의 중심에는 카메라가 있다. 파나히에게 카메라는 코란만큼 신성하다. 마을 사람들의 맹세 요구에 코란 대신 카메라로 자기의 증언을 촬영하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카메라는 진실을 보증하는 가장 권위 있는 도구다. 정부의 핍박에도 영화 촬영을 이어가는 것 역시 그가 카메라에 부여하는 의미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파나히 카메라의 권위는 자꾸 흔들린다. 박티아르와 함께 밀항하는 것이 좌절되자 자라는 파나히의 카메라를 비난한다. 박티아르의 여권이 가짜인 것을 속이고 자신만 출국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억지 희망 강요일 뿐이라는 일갈이다. 이는 파나히의 카메라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감독이 원하는 진실을 담아내는 수단이라는 고발이기도 하다.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은 감독의 지향이 어떻게 현실을 배반하는지를 톺는 자기 성찰적 장면이다. 파나히가 카메라에 담은 진실은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파나히의 카메라에 솔두즈와 고잘의 사진이 담겼을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심은 극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마을 사람들에게 파나히의 카메라는 ‘진실을 숨기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카메라로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고 변화를 촉구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복잡한 지층 속에서 그의 카메라는 작위적 미래를 그려내는 수단일 때도 있고, 폭력을 유발하는 촉매일 수도 있다. 파나히 역시 이를 알고 있다. 극 영화와 자전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혼재된 이 영화에 그가 자기 작업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소환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진실과 자유의 위대한 수호자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권력자의 허황된 위협을 상징하는 곰은 존재하지 않음(‘no bears’)을 고발하는 고고한 저널리스트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는 현실의 질곡 속에서 의도치 않은 효과가 나더라도, 그저 카메라로 무언가를 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졌을 뿐이다.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솔두즈와 고잘의 시신을 지나쳐 마을을 떠나던 중 그가 브레이크를 밟는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건, 앞으로도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대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윤리를 카메라로 말하길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곰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위안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더라도 곰 없는 길을 카메라에 담아내길 멈추지 않겠다는 파나히의 의지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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