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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y 27. 2024

예술계 거장 vs 이미지 세탁한 재벌 가문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8★/10★


  사진계의 거장과 예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 가문이 맞붙었다. 전자는 낸 골딘이고 후자는 제약회사 퍼듀 파마의 소유주인 새클러 일가다. 시작은 옥시콘틴이었다. 퍼듀 파마는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을 개발한 후 공격적 마케팅에 나섰다. 옥시콘틴의 중독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 약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만 말했다. 나아가 불법과 편법의 경계에서, 종국에는 불법으로 점철된 공격적으로 영업을 이어갔다(이 과정은 넷플릭스 영화 〈페인 허슬러〉 참고). 그 결과는? 수십만 명이 옥시콘틴에 중독됐다. 지금까지 60만 명 이상이 옥시콘틴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낸 골딘 역시 과거 수술 후 옥시콘틴을 처방받았고, 중독되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투쟁을 더욱 확장하기로 결심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두 번째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이 싸움을 담아냈다.     


  퍼듀 파마를 만나기 이전부터, 낸 골딘의 삶과 예술은 이미 투쟁이었다. 낸 골딘의 언니는 ‘마음이 병들었다’는 부모의 판단 때문에 정신병원에 머물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언니의 진료 기록에는 그녀가 평범한 정도의 반항심을 가진 청소년이었고, 오히려 부모가 문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죽었고, 골딘은 언니에게서 유쾌한 반항심을 배웠다. 골딘은 집에 있으면 ‘언니처럼’ 될 거란 우려에 부모님 집을 떠나 위탁 가정을 전전했고, 한 히피 학교에서 마침내 구원받았다. 이후 골딘은 게이, 드래그퀸 등의 친구들을 사귀며 퀴어 공동체에서 생활했고 스냅사진으로 친구들이 뿜어내는 삶의 생동감을 포착했다. 섹스보다 사진이 좋았을 정도로, 골딘은 사진에 심취했다. 메리 올리버와 마이클 커닝햄이 각각 《긴 호흡》, 《그들 각자의 낙원》에서 아름다운 산문으로 예찬한 바 있는 ‘게이들의 천국’ 프로빈스 타운의 레즈비언 분리주의자 공동체 일원으로 지내기도 했다. 보수적 가족의 억압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동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사회/문화 공동체로 이끈 셈이다. 이후에는 필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댄서, 성노동자 등으로 일했고 그녀의 사진이 품은 탈규범적 생명력의 예술적 가능성을 알아본 한 큐레이터에 의해 마침내 정식으로 예술계에 발을 디뎠다(골딘은 큐레이터에게 지금껏 작업한 사진을 모은 박스를 옮기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오럴 섹스를 해줬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데뷔 이후에도 녹록지 않았다. 남자친구와의 섹스 장면 등 그녀가 살아가는 일상의 생기를 포착한 사진은 조롱받았고, 기성 예술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투쟁으로서의 삶/예술도 이어졌다. 영화는 골딘이 미국의 에이즈 위기 당시 급진적 에이즈 운동을 벌인 단체 액트업과 함께 작업한 장면을 특히 자세히 비춘다. 정부의 무관심과 방치로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던 에이즈 감염인들과 당사자들이 벌이는 저항 운동은 퀴어 공동체에서 예술을 길어온 골딘이 옥시콘틴 중독자 당사자로서 퍼듀 파마와 싸우는 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을 터다.    

  

  영화는 골딘의 삶/예술 여정과 퍼듀 파마를 상대로 한 현재의 싸움을 번갈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미술관 내 새클러관에서 골딘과 동료들은 퍼듀 파마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새클러관은 새클러 일가가 엄청난 돈을 예술계에 후원한 대가로 설치된 곳으로, 메트로폴리탄뿐 아니라 구겐하임, 루브르, 대영박물관 서구의 유수한 미술관‧박물관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예술계에서 새클러 일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문제는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거다. ‘예술에서 후원자의 존재는 필수적인가’라는 물음에는 여러 입장이 있지만, 어쨌든 지금껏 예술에 늘 ‘큰손’ 후원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돈이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라면, 수많은 사람이 마약성 진통제로 고통받은 결과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자 그대로 죽음을 대가로 한 돈으로 예술을 후원해 사회적 명성을 쌓는 일은 예술-후원의 문제가 아니라 포괄적 사회 정의의 문제다. 낸 골딘은 예술이 가장 더러운 돈을 위장하는 데 쓰이는 일을,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모욕한 제약회사의 전시관에 자기 작품이 전시되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퍼듀 파마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것을, 무엇보다 예술계가 새클러 일가와 그의 영향력을 완전히 퇴출할 것을 요구하며 긴 싸움을 펼쳐나간다.     



  골딘이 속한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즉각적인 처방약 중독 개입)은 새클러관이 있는 여러 미술관을 두루 순회하며 행위 예술, 저항 운동을 전개하고 마침내 예술계에서 새클러 일가의 이름을 걷어내는 데 성공한다. 저명한 사진 예술가로서 쌓아온 명성과 추구해온 예술적 가치를 결합한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부분적이다. P.A.I.N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 활동가, 당사자의 싸움으로 퍼듀 파마는 파산했고, 새클러 일가는 60억의 합의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많다. 회사 파산으로 책임을 면피하고, 합의금으로 수천 건의 소송을 취하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적인 승리가 감동적인 이유는, 낸 골딘의 싸움이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상적인 답변을 내놓아서다. 예술에는 후원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예술은 늘 후원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낸 골딘이 그랬듯 예술과 정치를 도드라지게 결합할 수도 있고,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는’ 작품이라도 누군가의 내면과 사회의 심연에 근본적인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종종 예기치 못한 변화의 씨앗이 되거나 그 변화의 징후를 표상한다. 예술의 정치성을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예술이 최소한 기업가의 이미지 세탁보다는 더 정치적이라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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