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여자가 음악원에 가는 것보다는 시집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말하는 남자다(그러나 이 말의 대상인 미래의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면, 그의 말은 틀렸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결혼할 여자에게 자신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으며, 결혼하더라도 형제 관계처럼 지내야 할 거라고 거듭 확인시키는 남자다. 결혼식 당일 성당 앞, 남루한 차림의 어느 ‘미친 여자’가 설레는 마음의 신부에게 절대 그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남자다.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신부에게 그에게서 도망치라고 조언하는 남자다. 남성에게만 다정하고 그들과만 시간을 보내는 남자다.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한 돈의 융통이 어려워지자 그 돈만 믿고 있었다며 윽박지르는 남자다. 음악가를 꿈꾸는 아내가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남자다. 독수공방에 지친 아내가 침대로 다가오자 경멸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목을 졸라버리는 남자다. 마침내는 너의 집착 때문에 더는 창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재능 보존’을 위해 아내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남자다. 친구들을 앞세워 아내의 존재가 ‘신경 쇠약’의 원인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며 ‘태양’인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지 말라고 말하는 남자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만만치 않다. 그녀는 남편의 재능을 추앙한다. 아니, 숭배한다. 적극적인 구애 편지로 처음 미래의 남편을 만난 자리에서 남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자신의 지참금 규모를 어필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적극적‧자발적으로 자신을 남자에게 상납한다. 그녀의 ‘과잉’은 구애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 때문에 자기 재능이 좀먹고 있다고 모욕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외도가 이혼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는데도 단호하게 이혼 서류 서명을 거부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숙한 아내’였던 것도 아니다. 내내 남편에게 외면받고 별거하는 동안 육체적 관계만 나누던 남자를 따로 두었고,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아이는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진 후 유년기에 사망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 아내라는 지위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종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신은 나와 못 헤어져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집착이 증오, 경멸, 멸시 등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로 되돌아오더라도 남편에게 두려움, 소름 끼침 등을 줄 수 있다면 어쨌든 남편과 함께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녀는 남자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이 되기로 결심했고 죽을 때까지 그 결심을 삶으로 살아냈다.
남자의 이름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여자의 이름은 안토니나 밀류코바.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고 후자는 종종 동성애자인 남편에게 과하게 집착한, 천재 남성 곁에 으레 존재하기 마련인 ‘악처’ 정도로 종종 회자된다. 안토니나가 ‘천재 남편’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뒷받침하고 그의 ‘사생활’ 스캔들까지 두루 관리해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열렬한 감정도 사랑보다는 집착에 훨씬 가까웠다. 여러 모로 안토니나는 동시대 관객에게 ‘교훈’을 줄 위치에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실제로 영화는 왜 지금 다시 안토니나와 그녀가 차이콥스키와 맺은 관계를 다시 조명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기괴한 관계에서 우리는 이중 위계를 거스르는 한 여인의 편집증적 의지를 엿볼 수 있고,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안토니나는 음악가를 꿈꿨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 유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능이 있었더라도 어차피 시대적 한계로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콥스키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남성이었기에 재능을 펼치는 데 제약도 없었다. 그저 동성애 ‘추문’을 방지해줄 아내만 있으면 그뿐이었다.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가 된 안토니나가 실패한 건 바로 이 역할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이 남편에게 바친 사랑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 ‘태양’인 차이콥스키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집착적 애착은 예술‧젠더의 위계를 거슬러 남편에게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안토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신혼 초의 안토니나가 빨간 산호 목걸이를 차고 차이콥스키와 함께 길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차이콥스키는 산호가 진짜냐고 묻는다. 안토니나는 부끄러운 듯 혹은 이 상황이 우스운 듯 가짜라고 말하면서도, 일부 진짜 산호가 섞여 있다고 답한다. 차이콥스키는 ‘내 아내가 가짜 산호 목걸이를 차다니!’라고 혀를 차며 마찬가지로 웃어넘긴다. (차이콥스키에게는 그저 ‘가짜’이기만 했지만) 진짜와 가짜가 섞인 안토니나의 산호 목걸이는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혼재임을 가늠케 한다. 그녀는 정말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자신의 꿈을 대리 충족하는 수단으로 그의 아내 지위를 욕망한 걸까? 숱하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끝까지 지킨 데서 정말 행복을 느꼈을까? 상대를 절망시키고 넌덜머리 나게 하는 집착을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을까? 아마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할 이 물음은 우리가 연인에게 속삭이는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뒤흔든다. 당신은 정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