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라이즈 블리딩〉
루저만이 그만둔다(Only losers quit). 보디빌딩 대회를 준비하는 재키는 루저가 아니고 싶다. 사격장에서 일하는 재키는 총 쏘기를 배우기가 마뜩잖다. “총이 아닌 나의 힘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런 재키가 대회를 준비하며 스테로이드를 맞고 총으로 누군가를 살해한다. 그러니까, 자기 힘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힘으로 사건을 벌인다. 자신의 호기심을 배반하는 재키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재키는 루저다.
재키의 연인 루가 일하는 허름한 헬스장에는 ‘루저만이 그만둔다’와 같은 문구가 여기저기 걸려 있다. 대체로 강인한 정신력으로 몸을 가꾸자는 말들로, 끊임없이 이용자들에게 몸에 대한 정신의 통제가 ‘가능’하다는 주문을 건다. 루는 흡연이 독毒을 먹는 것과 같고, 몸이 세뇌당하는 것과 같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도 계속 담배를 피운다. 루는 흡연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루저다. ‘루저만이 그만둔다’는 명제는 담배 피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루에게는 반대로 적용되지만 상관없다. 재키와 루와 같은 사람들, 즉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남자에게 섹스를 해주고(재키) 가정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남편을 ‘사랑’하는 언니 걱정에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루) 사람들은 스테로이드 복용과 총 쏘기, 담배 피우기뿐 아니라 무엇을 그만두든 그만두지 못하든 언제나 루저일 테니까.
두 루저가 처음 만난 건 어느 허름한 헬스장이다. 루는 땀 흐르는 커다랗고 근육질의 몸을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주변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운동에 열중하며 대회를 준비하는 재키에게 한눈에 반한다. 대회 때까지 머물 곳이 없던 재키도 루의 호의에 반응하고 둘은 금세 레즈비언 연인이 된다.
루저인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부터 루저답다. 영화에는 루가 《마초 걸레들Macho Sluts》을 읽는 장면이 두어 번 나온다. 게이 사우나, SM 섹스, 난교 파티 등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은 아마존 도서 소개에 따르면 “여성 간 섹스의 변태적kinky 잠재력”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잘 쓴” 텍스트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로 1988년 출간 당시에는 격렬한 비난에 시달렸다. 특히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도 그랬다는 점이 중요하다. 페미니즘/퀴어 진영에서 성을 어떻게 이야기할지에 관한 논쟁(친포르노 vs 반포르노 등을 논쟁한 이른바 ‘sex war’)에서 초기에는 《마초 걸레들》과 같은 책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난타당했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루는 문학 취향에서마저도 루저의 운명을 타고났다. 어쩌면 혐오스러운 몰골로 루에게 집착하다 손쉽게 죽어버리는 또 다른 레즈비언 여성 데이지는 《마초 걸레들》을 핍박한 주류 레즈비언에 대한 루의 적대를 투영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존재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장면은 거의 없다. 루가 온 동네에 레즈비언이라고 소문이 난 상태인데도 그렇다. 루는 외톨이고, 그래서 루저다.
그러나 재키와 루, 두 루저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 재키는 미래를 꿈꾼다. 보디빌딩 대회에서 입상하면 캘리포니아에서 트레이너 일을 구해 바닷가의 멋진 집에서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미래 말이다(물론 재키는 스테로이드에 취해 루저답게 대회를 스스로 말아먹는다). 그러나 루는 실패할 미래마저 없다. 루는 남편에게 맞는 언니를 떠날 수 없다. 재키와 루의 로맨스가 꼬이는 건 여기서부터다. 두 사람은 하나의 미래를 공유할 수 없다. 재키가 루를 위해 폭력적인 형부의 문제를 살인으로 ‘해결’해주었는데도 그렇다. 결국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려면 공통의 미래를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사업을 위해 온갖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옥죄는 루의 아버지(가부장적 남성 권력)를 거슬러야만 한다. 재키는 “총이 아닌 나의 힘”을 탐색해야 하고, 루는 가족이라는 질곡을 잘라낼 결심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둘은 그렇게 한다. 물론 처참히 실패한 보디빌딩 대회의 여파로 재키가 꿈꾸는 미래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고, 루는 지금껏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미래를 그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국에는 두 사람이 꿈꾸는 미래의 포개짐은 허름한 트럭을 타고 떠나는 그 기나긴 길 위에서의 시간 어딘가에서 피어날 것이다.
전반부 전개와 두 사람이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엔딩은 이 영화가 〈델마와 루이즈〉의 2024년 판, 즉 죽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는 두 레즈비언의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죽지 않은 레즈비언은 어떻게든 살아가며 실패하더라도 언젠가 현재가 될 미래를 이야기할 것이다. 때때로 조악하고 엉뚱한 전개와 캐릭터 재현의 윤리적 문제(데이지)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상적인 장면(특히 레즈비언 관능에 관한)은 두 사람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이어가게끔 만든다. 두 루저는 ‘그만두지 않음으로써’ 루저가 아닌 혹은 루저여도 상관없는 세계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