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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l 29. 2024

단단히 '미친' 사람들의 보랏빛 사랑 이야기

영화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8★/10★


  K리그1(1부 리그) 승격을 눈앞에 둔 두 팀이 맞붙는다. 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팀은 리그1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확보한다. 두 팀은 치열한 공방을 벌이며 2:2로 팽팽히 맞선다. 경기의 끝은 점점 다가온다. 그때,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 한 명이 상대 진영 골망을 흔든다. 상대 팀 선수들은 탄식하며 주저앉고 같은 팀 선수들은 환호한다. 그러고는 세리머니를 하러 코너플래그로 뛰어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카메라가 선수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여전히 골대를 비춘다. 카메라는 결승골을 넣은 선수의 세리머니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제 골대 뒤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곳에는 선수들과 같은 보라색 옷을 입은 채 눈물 흘리며 기뻐 날뛰는 사람들이 있다. 관객이 들어선 곳보다 빈자리가 훨씬 많은, 단 한 번도 리그1에 올라가 보지 못한 만년 리그2 소속 팀의 경기에서 이들은 왜 이토록 정열적으로 격렬하게 집단적 환호·희열을 분출할까?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이 ‘기괴한’ 사랑의 궤적을 좇는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축구를 다루지만 스포츠 영화는 아니다. 안양의 역사를 다루지만 역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미친’ 사람들이 떼로 부르는 미친 사랑의 노래다. FC 안양은 2013년도에 창단되었다. 하지만 기원은 그보다 훨씬 앞선다. 1996년 창단된 안양 LG 치타스가 FC 안양의 전신이다. 경기장 근처를 지나가다 구단 직원의 호의로 경기를 처음 본 고등학생, IMF의 아픔을 겪던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안양 LG 치타스의 경기를 보며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 이들은 경기장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일상의 소중한 영역으로 편입했다. 그런데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2002 월드컵 붐을 계기로 더 많은 인구와 구매력을 가진 서울로 팀의 연고를 옮긴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FC 서울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포터즈 중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영화에서 FC 안양 서포터즈는 FC 서울을 ‘북패’라 부른다. 찾아보니 ‘북쪽의 패륜’이란 뜻이란다. 살벌하다).


  영화는 이후 팀을 잃은 서포터즈 RED가 다시 FC 안양을 얻어내기까지 지나온 길과 전두환의 3S 정책, 서포터즈 문화가 태동한 사회 문화적 배경(PC 통신) 등을 비춘다. 교과서적 정보 전달이 아닌 이른바 ‘약빤’ 편집으로. 당연하게도 이 모든 건 서포터즈의 입장에서 그려지는데, 코로나 팬데믹 때의 텅 빈 경기장에서 공허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스포츠에서 팬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이 장면을 통해 다시금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프로 스포츠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일종의 유쾌한 문화사를 팬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결국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RED는 단단히 미쳐 있다. 국내 프로 축구 응원에 해저 탐사에나 쓰이던 홍염을 처음 들여온 것도 RED고, FC 안양 창단을 위해 소속된 고학력자들을 모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서를 시에 제출한 것도 RED다. 집회에서 안양 LG 치타스의 상징색은 붉은 옷을 입고 마이크를 쥔 채 프로 축구팀을 창단하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도 RED다. 무엇보다, FC 창단 후 보라색이 팀 컬러가 된 후에도 “아주 붉은 것은 이미 보라색이다”라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붉은색 팀 컬러의 ‘북패’에게 팀을 빼앗긴 역사를 상기하며 으르렁대는 것도 RED다. 우리는 이 미친/지극한 사랑의 정체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두환은 자기 목적대로 정치 외에도 스포츠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보며 ‘3S가 역시 효과가 있었군!’이라며 흡족해할 수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실로 멍청한 생각이다. RED의, 그리고 다른 수많은 스포츠팬(나아가 모든 ‘팬질’)의 ‘무용한’ 헌신은 위정자의 의도를 가볍게 초과해 다른 가능성을 벼려낸다. 이윤을 얻으리란 보장이 없어도, 명예를 가져다 주지 않아도, 대형 구단보다 규모가 초라해도, 경기에 패배해 일주일이 내내 우울한 일이 일상이어도 서포터즈는 팀을 사랑하며 ‘극락’하기를 멈추지 않는다(안양安養은 불교에서 극락이라는 뜻이고, ‘수카바티’는 극락의 산스크리트어다). 라이벌 팀을 죽일 듯이 미워하면서도 그들 역시 자신과 비슷하게 무언가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데서는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를 돕는다. 부러 돈과 마음을 들여 동료 서포터즈와 선수를 챙긴다.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무지 가성비가 맞지 않는 일들이다(고도로 상업화된 인기 스포츠의 대형 구단 팬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성이 기묘한 매력을 뿜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제삼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도저히 끌릴 만한 요소가 ‘없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단단히 미쳐 있다는 데서 오는 기묘함 말이다.



  이 기묘함 앞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멈칫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존재를 압도하는 거대한 무언가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와 공포를 아울러 ‘숭고sublime’라 이름 붙인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정이 이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팬질’ ‘덕질’에 ‘숭고’까지 갖다 붙이냐며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무언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이 ‘무용한 열정’이 나를, 일상을, 관계를 얼마나 커다랗게 바꾸어 ‘우리’의 탄생으로 이어지는지를. 존재의 극적인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분명 ‘숭고’라는 말을 붙일 만큼 대단한 일이다. RED의 모든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다 옳고 의미 있다는 말이 아니다. RED로 대변되는 서포터즈, 팬덤이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상상할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2022년 개봉한 〈성덕〉이 보여주었듯, 우리는 이 지극히 ‘사적인’ 사랑을 통로 삼아 퍽퍽하고 구린내나는 현실을 돌파할 무언가 기묘하고 새로운 통찰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사랑 고백 영화가 필요하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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