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탈주〉
규남에게는 정해진 운명, 주어진 운명이 있다. 앞길을 스스로 정할 자유는 없다. 그래서일까? 가증스럽다는 듯 탈주 과정에서 자동차로 인민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간판을 박살 내는 것은. 목숨을 걸고 애써 작성한 지도는 비에 젖어 알아볼 수 없고, 질척거리는 늪은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깊어만 간다. 규남은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로 탈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이상하다. 만기 제대를 앞둔 북한의 병사 규남이 그토록 갈망하는 남한은 규남이 살고 있는 지옥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 대북 확성기의 달콤한 약속처럼 남한에서는 자유와 행복만이 가득할까?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 솟아날 구멍이 열릴까? 정말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도전이 장려되고 정당한 기회가 보장될까?
진보, 보수를 망라하여 그 어떤 국내 언론도 남한 사회를 저렇게 그리지는 못한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적’ 차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두 사회의 차이는 분명 ‘절대적’이다. 규남이 실패조차 할 수 없는 북한보다 무수한 실패라도 할 수 있는 남한을 갈망하는 이유다.
그러나 영화가 한껏 의미를 부여한 실패가 그리 쉬이 낭만화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살기 위해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규남의 탈주에 고개가 끄덕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껏 실패하기 위해서? 이것이 정말 탈북의 이유일 수 있을까? 남한에서의 실패는 이토록 쉬이 낭만화될 수 있는 것일까? 영화는 의도치 않게 지금 우리가 사는 ‘또 다른 지옥’을 ‘욕망할 만한 천국’으로 둔갑시킨다.*
근본적인 실패는 오히려 규남을 좇는 현상의 것이다. 그는 ‘너도 나처럼 도전하라’는 규남의 말에 격분해 미친 듯이 날뛴다. 현상은 원하는 음악을 하지 못한 채 가업인 군인을 선택했고, 진정 사랑하는 듯 보이는 동성 대신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임신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받아들였다. 현상은 부와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물리적·정치적 생명을 부지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하지만 그 외 인간의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현상이 규남이 전한 희망에 감화되는 영화의 결말이 쉬이 이해되지 않은 이유다. 실패와 희망에 관한 메시지를 걷어내고 영화가 빼어나게 선보인 장르영화의 재미에만 몰두했을 때만 썩 즐길 만한 영화다.
*이에 대한 참고할 만한 영화적 레퍼런스로는 북한이탈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