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고니아〉
테디는 벌들이 죽어가고, 지구가 망해가는 이유가 안드로메다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물류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거대 바이오 회사 대표 미셸이 그 외계인이라고 확신한다. 테디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사촌 동생 돈을 세뇌하듯 꼬드겨 미셸을 납치해 지구를 구하기 위한 계획을 짠다.
미셸과 테디의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흥미롭다. 테디는 미셀 납치와 ‘지구 구출’에 집중하기 위해 돈에게 화학적 거세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아름다운 외모의 미셸을 납치했을 때 욕망에 흔들려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다. (진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 역시 이미 화학적 거세를 마쳤다고도 한다. 이는 어쩌면 테디가 어릴 적 남성 보모 아르바이트에게 당한 학대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테디가 받은 학대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지만, 이는 성적 학대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테디에게 성욕은 괴로운 것 혹은 일을 망치는 무언가다.
한편 미셸은 ‘열려 있는, 깨어 있는’ 리더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열심이다. 미셸은 늘 ‘자율’을 강조한다. 누구든 원하면 제때 퇴근해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다만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자율적’으로 퇴근 시간을 조정하면 될 뿐이다. 미셸은 다양성과 젠더 평등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회사 홍보 영상에서 자애로운 얼굴로 말하던 미셸은 NG가 나자마자 욕설을 하며 연설문 내용이 별로라며 다그치는 상사이기도 하다. 요컨대, 여성 CEO인 미셸은 자기 젠더를 위선적인 방식으로 활용하고 팔아먹는 사람이다. 자본가로서의 이윤 추출 혹은 외계인 본연의 임무만이 그녀에게 중요하다.
두 사람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기이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두 젊은 남성이 한 젊은 여성을 납치해 감금했는데 성적 모욕이나 학대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외계인의 교신’을 막기 위해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긴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다. 때문에 세 사람은 ‘편집증’에 사로잡힌 가난하고 소외된 자와 능수능란한 협상으로 걸핏하면 심리전을 거는 자본가의 구도 안에서‘만’ 관계 맺는다. 다른 한편, 영화가 두 캐릭터를 ‘무성애적 상황’으로 몰아넣은 게 어쩌면 자본의 착취와 폭력의 이름으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그저 배경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둘 중 무엇이 더 적확한 해석일지는 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여하튼 성욕이 없는 남자와 젠더가 없는 여자는 각각 지구를 지키기 위해, 지구를 탈출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고, 원작 〈지구를 지켜라!〉와 마찬가지로 승리를 거둔 외계인은 인간에게 종말을 선사한다. 차이점이라면 원작이 지구를 폭파시키는 데 반해 이 영화는 지구의 다른 모든 종은 그대로 두고 인간만 말살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지구를 살리겠다는 테디의 바람이 기이한 방식으로 성취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