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무리를 앞두고 제주를 찾았다. 제주의 폭설과 강풍으로 이미 출발 전 한차례 결항 통보를 받은 뒤였다.
기상악화가 풀리면서 막혔던 하늘길이 다시 열린다고했다. 며칠간 발이 묶였던 여행객들이 몸서리치며 각자의 집을 향해 출발할때 우리는 제주공항에 내렸다.
반면 설경을 눈에 담기 위해 제주를 찾은 또 다른 수많은 관광객과 그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인해 1100 고지 휴게소 부근의 왕복 도로는 대혼잡을 빚고 있었다. 우리도 입도하자마자 1136번 도로 위에 올랐다. 그 인파 속 일부에 합류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도로를 점령해버린 차량들 틈에서 정차 장소를 점유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눈치게임 완패의 결과였다.
결국 우리는 산록도로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에둘러 돌아 중산간의 숙소로 성과 없이 돌아왔다. 이는 어쩌면 의도된 설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오기 전부터 겨울 산행 자체를 못마땅해하던 운전자이자 나의 남편이 조수석의 아들 녀석과의 은밀한 작당으로 자발적 실패로 이르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보다 가까이에서 설산의 풍광을 보고자했던 나의 바람은 눈앞에서 불발로 끝났지만 대신 나는 여유로운 시간을 얻었다.
숙소로 복귀한 남편과 아들이 운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는 부지 내 독립 단층건물에 마련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구비되어있는 장서 중에는 흥미로운 책들이 꽤 많았다.
빼곡하게 서가를 채운 장서들을 훑다가 낯익은 표제를 발견했다. 20여 년 전 <황금털 사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후 절판상태였던 최승호 시인의 그 책이 맞았다.
표제작이자 잘 알려진 그의 시 중 하나인 <눈사람 자살 사건>을 눈 쌓인 휴가지에서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그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사실적이어서 당황스럽다가도 읽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혹은 과하게 냉소적인 거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가면 뜻밖의 슬픔이 배어 나오기도 한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죽어야 할 이유도 그렇다고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알지 못했던 눈사람. 그는 텅 빈 욕조에 누워 뜨거운 물을 틀지 찬물을 틀지에 대해 잠시 고민을 하지만 결과는 같을 거란 걸 안다.
눈사람은 춥게만 살아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싫었을까? 아니면 언제는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이 눈을 굴려 자신의 형상을 정성껏 만드는가 싶더니 이내 부주의한 발길질로 인해 처참한 모습이 된 스스로를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어쩌면 봄이 오면 스르르 모습을 잃고 사라지는걸 너무 잘 알고 사는 동안 이를 무한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타고난 운명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리기로 작정한 거라면?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온통 눈으로 덮인 삼나무 숲을 지나 고요한 들판 위를 조심히 달리며 해를 감추었다 조금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흐린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 텅 빈 욕조에 누워 있던 그 눈사람을 불러 내어 내 옆에 앉혀놓고 찬찬히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당신,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길 잘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