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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shirley Jan 03. 2023

1.왜 다시 호주를 가기로 결정했냐면

5년 만에 호주로 석사유학 떠나기

다시 글을 쓰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인생에서 또 다른 도전을 준비 중이었고, 그 도전이 내 인생에서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챕터를 여는 것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호주에 다시 와있다. 이번은 유학, 그것도 해외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따겠다는 야심 찬 각오로 오게 된 유학이다. 왜 호주를 선택하게 됬는지, 어떤 분야를 공부하게 됬는지, 쉽지 않았던 유학 준비과정,그리고 험난하고 혹독했던 나의 유학생활 적응기를 생생한 감정으로 담고 싶어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서른다섯을 맞은 작년 새해에 나이가 주는 중압감은 생각보다 컸다. 서른셋, 넷까지는 그래도 삼십 대 초반이라고 우겨볼 수 있었지만 다섯부터는 빼도 박도 못하는 중반이었다. 불혹이라고 하는 마흔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 현실에 대한 불만만 가득한 채 어영부영 마흔을 맞을 것만 같았다. 또한 결혼이나 출산 등 한국의 그 정해진 시간의 틀에 억지로 내 인생을 끼우고 싶지 않았다.

  

 해외에서의 석사유학, 승무원으로 일하면서부터 어렴풋이 꿈꿔왔던 것이었다. 내가 살아 보고 싶은 나라에서의 유학이 미련처럼 남아있었던걸 애써 부정하고 한국에서 자리 잡아 보려고 했던 건, 이제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나이를 실감했고 그만큼의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해외에서 좀 더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두드렸고 이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나는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퇴사, 그리고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회사였다. 사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야근 역시도 다른 회사에 비하면 현저히 적었다. 하지만 이미 한국사회의 그 수직적인 상하관계에 진절머리가 나있었고, 내게 가해진 불합리한 갑질에 작게나마 반기를 들었던 건 내 안의 인내심이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나는 1월이 되자마자 회사에 퇴사의사를 알렸고 그렇게 1월이 끝날즈음 나는 회사에서의 내 자리를 정리했다.       




서울에서의 2년간의 삶을 정리하면서 나는 마음을 더 굳게 다져야 했다.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각오. 그리고 유학을 결정하고 빠른 시일 내에 출국하겠다는 계획을 실행시켜야 했다.


먼저 어떤 나라로 유학을 가야 할지에 대해서였는데 캐나다와 호주사이에서 나는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캐나다가 이민에 관해 굉장히 친화적인 제도를 발표하고 있었고, 취업을 연계한 이민으로 1-2년 안에 이민에 성공하는 사례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캐나다 이민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캐나다를 선택하기에 나는 호주라는 나라에 지독한 노스탤지어가 남아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5개월 남짓한 워홀을 승무원 면접 합격으로 인해 정리해야 했고, 승무원이 되고 나서 비행으로 호주에 올 때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오죽하면 동기 동생은 언니는 호주비행만 가면 물 만난 물고기 같다고 했을까. 그만큼 나는 이 나라에서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는 미련이 가득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호주에서의 삶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리고 멜버른 브이로그 영상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확신했다. 이건 호주에 다녀온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오면 앓는다는 말로만 듣던 그 호주병이 분명하다고.

해외에서 산다는 건, 아니 일단 집을 떠난다는 건 고생하는 게 당연한데, 이왕이면 살고 싶은 나라에서 사는 게 고생을 하더라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호주는 워홀 때 이미 살아본 곳이니 적응하는 것도 빠를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유학 후의 이민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지금 이 나이에 유학을 간다는 건  유학 이후에 이민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걸 부정할 수 없었다. 유학을 다녀와서 한국에 돌아와서 자리 잡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계획은 이민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장기계획이어야만 했다.

가장 먼저 유학 할 도시. 당연히 내마음속의 1지망 도시는 행복한 워홀의 기억이 남아있는 멜버른이었다. 하지만 멜버른은 시골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대도시였다. 영주권을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야속하게도 나이점수라는 게 있었다. 거기서 이미 점수를 얻지 못하는 나는 지역점수라는 것을 꼭 받아야 했는데 리즈널 지역, 소위말하는 인구가 적은 시골지역에서 학업을 이수하고 거주하면 그 지역점수라는 걸 받게 되는데 그 점수가 지금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영주권 심사 때에는 그 점수가 굉장히 간절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결국 1 지망 도시였던 멜버른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고 리즈널 지역으로 발표된 지 얼마 안 되는 골드코스트를 선택하기로 했다.


5년 전, 워홀 때와는 달리 나에게 내려놓을 것들은 생각보다 큰 것들이었다. 서울에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과 한살이라도 더 먹기전에 해외에서의 삶을 도전해 보고싶은 마음사이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있는 2년 동안 내 용기는 이미 조금씩 깎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 지금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내 안의 의심의 소리들은 커져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용기가 더 이상 깎여 없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5년 전, 호주워홀을 선택했던 서른 살의 나는 툭-치면 무너질 정도로 연약했다. 그러나 워홀을 지나 꿈꾸던 승무원으로 합격 후 비행했던 시간들, 다시금 한국에서의 사무직으로 이직 후 쉼 없이 달려온 5년간의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몇 배는 더 어려워진 레벨의 이번 도전은 결코 쉽지 않을걸 알지만, 내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나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목표가 이끄는 삶은 나를 살아있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분명하기에 나는 또다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다. 가장 나답게 살아가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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