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 만의 꿈같았던 한국휴가

-잊고 있었던 가치와 앞으로 나아갈 목표

by 셜리shirley

이른 아침,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했다.

자그마치 2년 반만의 한국행이다. 작년 졸업비자가 무산되고, 풀타임으로 일하지 못해 학비와 비자비를 마련하는데 시간이 배는 걸리는 바람에 한국에 휴가를 간다는 엄두조차 못냈다. 게다가 영주권 준비를 위해 아이엘츠 시험공부에 올인하느라 일을 줄이는 바람에 수입이 줄어든 상황에 휴가를 갈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비자가 만료되는 내년 3월 이후 비자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한 가운데 한국을 다녀온다는건 사실상 무모한 결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에게 한국에서의 시간이 너무나 간절하게 필요했다.


졸업 후, 나는 계속해서 매일이 쫒기는 기분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이미 졸업비자를 받아 정직원으로 사회복지사로 취업하고, 그 취업을 토대로 영주권을 신청하며 차근차근 스텝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학생비자 주 24시간 근무제한에 묶여 제대로 된 취업활동 조차 할수 없었다. 할 수 있는건 제일 오래 해온 서비스직 이었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까지 더해지며 학비와 비자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저녁에는 캐시 잡으로 추가로 일을 하다보니 지치다 못해 깎여나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서비스직으로만 일하다가 비자가 만료되는건 너무나 억울하게 느껴졌다.


결국 큰마음 먹고 커리어의 전환점을 찾기위해 도전한 어학원 사무직은 권위적인 상사와 동료의 텃세에 매일 울면서 퇴근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다시금 돌아온 카페 서비스직은 대체자 없이 휴가한번 쓰지 못했고, 최저시급으로 거진 노동착취에 가까운 근무형태였다. 가장 힘들었던건 옮긴 직장들에서의 인간관계였는데, 온갖 인격을 짓밟는 소리들을 영어로 듣다보니 차라리 영어를 못알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러다가 모든걸 놔버리고 말것같다는 경고의 알람이 울리는걸 깨달았다. 이미 알람은 여러차례 울렸지만 조금만 더 참아야지, 돈을 좀더 모아서 번듯한 선물도 챙기고 부모님께 적어도 뭐하나는 이룬걸 보여드릴수 있게 준비되서 가야지 라는 생각으로 알람을 애써 무시하며 나자신을 꾹꾹 억눌렀다.

하지만 그게 답이 아니었다. 지친 상태에서 영어공부와 일을 무리하게 병행하며 목표성을 계속해서 잃어갔다. 도대체 내 삶은 언제쯤 레벨업을 할수 있는걸까, 쉬지않고 일을 해도 수중에 쥐어지는 돈이 없는데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생고생해서 학위까지 받았는데 이걸 살려 취직을 할수 없는 상황에서 좌절감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고장난 엔진을 고치기보다 연료만 계속해서 붓고 어떻게든 달리는것에만 급급하다보면 쉽게 연료가 소진되고 결국 차가 망가지는 것처럼, 나는 번아웃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채 계속 앞만보며 달려왔고, 마음의 구멍이 숭숭 나버린채 삶에서 마주하는 작은 고난들에도 쉽게 무너졌다. 결국 나는 한국을 가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야만 내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수 있을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한국이 싫어서' 라는 영화를 보며 내가 처음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왔을때의 내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말 한국에서 도저히 살수 없을거 같아서 도망치듯 호주로 왔는데, 지금 나는 그 한국이 이렇게 그리워질줄 몰랐다. 삶은 참 이렇게나 아이러니하다.


아침 8시에 호주 브리즈번을 출발해 10시간의 긴 비행끝에 도착한 한국,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 이동해 국내선 부산행을 환승해서 겨우 부산에 도착하니 밤 9시였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공항 입국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와 2년반만에 포옹하자마자 눈물이 왈칵 터졌다. 진작에 힘들어 죽을거 같았을때, 그냥 올걸 그랬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가족들과의 시간까지 희생하면서 그렇게 억지로 버텼을까.


집으로 돌아오자 깨끗한 침구와 정돈되어 있는 내 방에 들어서자 그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엄마는 휴가 2주동안 먹고싶은거나 필요한게 있으면 알려달라며 매일매일 나에게 줄 생각만 했다. 동생 역시도 카페며 맛집이며 좋은 곳들을 데려다니며 나를 챙겼다. 동네 목욕탕도 가고, 편의점에서 과자를 고르는 평범한 일상들이 , 밤마다 수다떠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던 새벽이, 집밥을 먹는 매끼가 너무 행복했다. 나혼자 외출하는 날이면 엄마와 동생이 문 앞까지 와서 잊은것은 없냐며, 옷이나 신발등등 잔소리를 해대는데 나는 그 잔소리가 왜그렇게 좋았을까. 2년만에 만난 가족들과 보내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속에 속이 텅텅 비어 있던 나는 채워져가고 있었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구나 다시금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늘 내자신의 효용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했다. 호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해야 했고,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납세를 잘하고 있으며 주소지가 확실한 거주자인지 증명해야 할 서류가 항상 필요했다. 트라이얼에서는 일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채용될 수 있었고, 무급실습에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해도 졸업을 위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기에 참고 버텨야했다. 나이로 인해 졸업비자를 받지 못하게 되었을땐, 35세라는 나이가 내게는 주홍글씨 같았다. 안그래도 35세가 노산을 결정짓는 나이라는데이래저래 나이로 치이는것 역시 내 가치가 나이로 판단되는것 같아 자존감이 떨어질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나는 언제나 엄마아빠의 귀한 큰딸이었고, 동생에게는 가장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같은 언니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게 나에게는 잊고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1년에 한번은 한국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것. 이 목표안에 사실 많은게 포함되기는 한다. 1년에 한번은 한국에 들어오려면 자유롭게 한국을 왔다갔다할수 있는 비자와 안정된 직장, 수입이 있어야 하니까. 영주권이 목표가 되었을땐 무겁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가족들과의 시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자 조금은 더 모티베이션이 생겼다. 만약에 영주권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한국에서 가족들과의 시간을 우선순위로 정해야 한다는건 확실해졌다. 이번 휴가를 통해 가족들에게 받은 사랑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의 비자가 연장이 될지, 영주권을 받을수 있을지 아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최악의 상황에 내년 비자가 만료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게 실패를 의미하는게 아니라는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이 이제는 나 자신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있는것 같다. 여전히 두렵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언제고 나를 찾아올것인걸 안다. 하지만 그 어떤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내 마음속에 살아있기에, 그 닳지 않을 소중하고 애틋한 마음을 끌어안고 그렇게 또 남은 호주에서의 하루들을 채워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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