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작가 열전 23] 감정이 머무는 자리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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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는 시작과 멈추지 않는 끝, 2025, 순지에 채색, 90×180cm


누구나 겪지만 쉽게 붙잡히지 않는 감정의 흐름, 장한이 작가는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붓으로 포착하고, 종이에 새기며, 감정이 자라나는 구조를 회화로 만들어낸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감정이 머무는 자리, 사라지기 직전의 흔적들을 섬세하게 시각화해온 그는 빨래를 널고 책을 건네는 평범한 행위 속에서 감정의 리듬을 읽어낸다. 그렇게 포착된 감정은 격자무늬나 절기, 시에서 파생된 은유적 이미지로 변환된다. 그의 화면은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돈해주는 마음의 구조물과도 같다.


동양화를 전공한 경험에서 비롯된 재료에 대한 민감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험적 감각은 감정의 물성을 회화로 구현하는 장한이만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혼란에서 출발한 감정은 붓질을 따라 질서로 전환되고, 마침내 온기로 정제된다. 이 감정의 정화 과정을 통해, 그의 회화는 하나의 ‘명상법’이 되어 스스로를 다독이고 관람자에게도 조용한 울림을 건넨다.


5월 18일부터 부산 영주맨션에서 열리는 2인전 《명상법》에서는 절기의 흐름을 감정의 결로 풀어낸 장한이 작가의 회화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장한이 작가의 내밀한 작업 세계에 한 걸음 다가가고, 전시 《명상법》을 통해 작품을 직접 마주해보는 시간을 경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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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나답게 살기로 결심하다, 2025, 순지에 채색, 60×90cm


-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린다.


저는 회화를 기반으로 감정의 흐름과 일상 속의 미세한 변화를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장한이라고 합니다. 매일의 감정,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를 시각적으로 붙잡아두는 데에 관심이 많고요, 반복되는 삶 속에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것을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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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춘분: 지각자를 위한 마지막 알람, 2025, 순지에 채색, 60×90cm (우)청명: 나는 너에게 무엇인가, 2025, 순지에 채색, 60×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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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우수: 마음 밭갈이, 2025, 순지에 채색, 60×90 cm (우)곡우: 세가지 씨앗, 2025, 순지에 채색, 60×90cm


- 본인의 작업에서 근간이 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에 대해 설명해 달라.


제 작업의 중심에는 ‘기록’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아주 개인적인 감정의 흔적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누적되고 축적되면 어느새 보편적인 정서나 시간의 감각으로 이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달력, 24절기, 날씨 같은 구조화된 시간 단위를 감정의 흐름과 연결해서 작업하기도 하고, 종이에 물감이 스며드는 정도까지도 감정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한 방식으로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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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렁이는 원룸》전시 전경, 2024, 서리풀 휴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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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이용 안내: 빌려드립니다》전시 전경, 2024, 챔버


- 수건을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거나, 책을 빌려주는 행위에서 비롯된 작업이 흥미롭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고 어떤 의도로 시작했나?


감정이라는 게 참 일상 속에서 흘러가잖아요. 빨래나 책처럼요. 저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반복하는 행위들, 예를 들면 빨래를 넌다든가, 책을 빌리고 반납한다든가 하는, 이 안에 감정의 리듬이 담겨 있다고 느꼈어요. 빨래건조대나 북 카트 같은 구조는 그저 비유적인 장치가 아니라, 제 감정을 담는 하나의 매개체였어요. 관람자가 그 상황에 감정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기를 바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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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졸, 2024, 순지에 채색, 34.2×26.2cm


- 그럼에도 작가의 작업은 페인팅, 평면회화를 근간으로 작업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동양화를 전공했던 바와 연결되나? 아니면 작가의 단순 취향에 따른 결과인가?


아무래도 동양화를 전공했던 경험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동양화는 재료에 민감한 회화잖아요. 종이, 먹, 아교 같은 재료들이 감정의 깊이나 뉘앙스를 미묘하게 표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하니까요. 저 역시 그런 감각을 익히면서 회화가 지닌 감정 전달력에 더 깊이 빠지게 됐고, 지금의 평면 작업도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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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에 대롱대롱, 2020, 장지에 백토 카제인 물감, 50*50cm


- 작가 노트에 적은 '순지에 밀가루풀과 백토를 혼합해 아교 포수를 재해석한 기법'은 무엇인가? 작가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또한 카제인 백토 물감은 무엇인가?


기존의 아교 포수 방식은 동양화에서 굉장히 기본적인 밑작업인데요. 저는 그걸 제 식대로 변형해 봤어요. 순지의 흡수성을 조절하면서도 붓질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밀가루풀과 백토를 섞어서 포수했어요. 그 위에 올리는 물감도 일반 수채물감이 아니라 밀가루풀과 호분을 이용해 투명도를 조절해서 사용하고 있고요. 표면에 고루 스며들면서도 붓터치가 자국처럼 남아서, 회화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표현하는 데에 좋아요. 일종의 ‘내 감정에 맞는 피부’를 스스로 개발해 쓰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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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상상, 2019, 순지에 먹 백토 카제인 오일스틱, 130*160cm


- 재료에 대한 여러 실험을 즐기는 것 같다. 재료 실험이 작가의 작업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인가?


재료 실험은 제 감정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중요한 통로예요. 감정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오는 건 아니잖아요. 때로는 투명하게, 때로는 뭉근하게 스며들기도 하고. 그런 걸 표현하려면 재료도 매번 조금씩 달라져야 하더라고요. 붓의 속도, 종이에 올라가는 밀도, 물감의 농도 이런 것들이 감정의 질감을 구체화해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실험은 그 자체로 창작 과정의 일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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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思架), 2024, 순지에 채색, 97×1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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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고 싶은 것과 드러내야하는 것, 2021, 순지에 채색, 46×72cm


- 작가는 시를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활용하려 했던 시서화 삼절의 시 의도와 다른 현대적 요소는 무엇인가?


저도 시서화 삼절처럼 감성과 언어, 이미지의 관계에 늘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조선시대 시 의도가 정제된 이상향이나 교양의 세계를 드러냈다면, 제 작업은 좀 더 감정의 흐름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제게 시는 은유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언어이고, 저는 그 언어의 질감을 이미지로 옮기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문학적인 서정성을 시각적인 리듬이나 반복, 추상적인 패턴으로 바꿔 표현하는 경우가 많고요. 좀 더 감정에 가까운 시 의도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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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정, 2019, 종이에 채색, 70x70cm


-초기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격자 무늬가 최근까지도 이어져 오는 것 같다. 격자무늬는 작가의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습관 같은 건지, 의도된 조형요소인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형태였는데요. 계속 작업하면서 저한테는 격자무늬가 ‘마음의 밭’처럼 느껴졌어요. 밭을 고르고 가지런히 갈아낸 뒤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그 구조 안에 감정을 하나하나 심는 느낌이랄까요. 격자는 단순한 기하학적 패턴이라기보다는 어떤 ‘자리’의 구조예요.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 혹은 내가 채워나가야 할 칸들. 그래서 반복되는 격자 안에 작은 도형들이 놓일 때마다, 그게 씨앗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 자체로 하나의 장소이자, 감정이 쌓이고 자라는 공간이 되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감정의 흐름을 질서 있게 다듬고,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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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쉽지않아, 2022, 순지에 채색, 23x23cm


- 어두운 색조 위조의 작품에도 곡선을 활용하거나 비정형의 물체들이 유영하는 듯한 화면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 노트에서 ‘불안과 같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고민의 흔적이 작품에 스며들게 하고 이 과정의 결과물을 작업물로 만든다’ 라고 하였는데, 고민과 문제를 해결한 결과이기에 긍정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인가?


맞아요. 처음엔 늘 불안이나 복잡한 감정에서 출발하는데,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 속에서 그 감정이 조금씩 정리되고 가라앉는 걸 느껴요. 그러다 보면 작업이 끝났을 땐 처음보다 훨씬 온화한 에너지가 남더라고요. 그래서 결과물에서 따뜻함을 느끼셨다면, 아마 그 감정의 정화 과정이 스며든 결과일 거예요. 그림을 통해 저 스스로도 감정을 다독이고 있는 셈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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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 2025, 순지에 채색, 53x49.9cm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가장 가까운 계획으로는 오는 5월 18일부터 부산 영주맨션에서 열리는 2인전 《명상법》이 있어요. 작가 원나래 님과 함께 ‘가꿈’이라는 키워드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전시인데, 저는 여기서 24절기 연작 중 9점을 선보이게 됩니다. 작은 회화 작품들을 하나의 구성으로 배열해 절기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인데요, 이 작업을 통해 감정이 자연의 시간과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를 관람자와 함께 나누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이 ‘이십사절기’ 전 시리즈를 완성해서 하나의 큰 개인전으로 펼치는 것이 목표예요. 단순히 회화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절기의 순환 구조에 맞는 공간 설계와 감정의 리듬을 반영한 구성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있고요. 더 나아가 이 연작들을 그림 산문집 형태로 엮어서, 감정의 기록이자 시간의 흔적으로 남길 수 있는 출판 작업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게 있어 전시는 ‘보여주는 일’이지만, 책은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감정의 흐름을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지를 여러 방식으로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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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법(Meditation Manual)》


전시 작가 : 원나래, 장한이 Narae Won, Hani Jang

전시 기간 : 2025. 5. 18~6. 15.

오프닝 : 2025. 5. 18 오후 2시

관람 시간 : 10:00~18:00(매주 월화 휴관)

입장료 : 무료

문의 : youngjumansion@gmail.com 또는 인스타 DM

주소: 부산 중구 영초길 51 영주아파트 9-다동 지하 5호

디자인: @studio.165.design


장한이 (b. 1995)


학력

2023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석사

2019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동양화과 / 미술사학과 학사


개인전

2024 《사가 이용 안내: 빌려드립니다》, 챔버, 서울

2022 《마음서가》, 유영공간, 서울

2022 《세품생활》, 프로젝트 스페이스 영등포, 서울


주요 단체전

2025 《명상법》, 영주맨션, 부산 (5월 예정)

2024 《Pieces of Us》, 도잉아트, 서울

2024 《소품물 小品物》, 오온, 서울

2024 《술렁이는 원룸》, 서리풀 휴 갤러리, 서울

2024 《상상 스펙트럼: 무한한 경계》, 언바운드, 서울

2023 《소소함의 모양》, 수원시립어린이미술체험관, 수원

2023 《FrÜhling 다시, 봄》, 프로젝트17717, 서울

2023 《I'm Doing Good》, 갤러리 루하 아키텍츠컬렉션, 서울

2022 《좌충우돌》, 레이프로젝트서울, 서울

2022 《회화》, 팩토리2, 서울

2022 《그린앤골드》, 픽앤플레이스, 서울

2021 《사람이 책이다》, 대안예술공간 이포, 서울

2021 《제3의 과제》,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수상 및 선정

2025 영주맨션 작가 공모 선정 (원나래X장한이 팀)

2024 서초문화재단 《서리풀 휴》 갤러리 전시 공모 선정 (장한이X허수정 팀)

2024 챔버 《OPEN CALL》 선정 (강수빈 기획X장한이 팀)

2023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준비금 지원사업 선정

2023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 준비 선정

2022 경기문화재단 생애 첫 지원 선정

2022 유영공간 전시 기획 공모 선정 (100% 지원)

2021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신진예술인 창작준비금 지원사업 선정

2021 프로젝트 스페이스 영등포 전시 지원 공모 선정

2021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제3의 과제》 공모 선정


레지던시 및 프로그램

2024 시각예술 분야 여성예술인 네트워크 ‘루이즈더우먼’ 운영진 (홍보팀장)

2023 《모양 일기》 작가 전시 연계 프로그램, 수원시립어린이미술체험관

2023 《불타올라 떠내려가라》 온라인 네트워크 전시 프로그램, 김주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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