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중의 미디어아트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

by 데일리아트

“AI의 지식과 기술은 매우 방대하고 끝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미시적 규모(micro-scale)로 작업해야 합니다. 아주 좁게요. 너무 좁아서 AI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바늘구멍을 통해서요.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예술을 만들 수 있습니다.” 뉴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 b.1960)는 2025년 웹 출판물을 통해 젊은 예술가에게 편지를 보냈다.

AI 시대, 이미지의 생산과 해석은 인간의 감각을 넘어 기계의 환각으로 진입하고 있다. AI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분석하고, 제안하는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마주할 때, 그것은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적 실재와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계의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일종의 환각에 불과한 것일까? 강익중(Kang Ik-Joong, b.1960)의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 를 통해 디지털 기술과의 협업 가능성을 탐색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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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중 작가. '그냥'이라는 작가의 호를 닮은 천진한 이미지

강익중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설치미술가다. 최근 AI를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1960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강익중은 1984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공부했다.

1984년 유학 초창기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던 그는 작은 캔버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에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이 강익중을‘3인치’예술가로 알려지게 한 계기였다. 그는 다양한 문자와 상징, 이미지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자신의 일상을 표현했다. 동서양의 풍경, 언어, 문화의 혼합과 조화는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서로 다르거나 단절된 것들을 ‘연결’하는 원리는 그의 예술적 비전에 핵심 요소였으며, 국내외에서 추진해 온 많은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서도 이 원리가 확장된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의 2인전 <멀티플/다이얼로그>(1994), 특별상을 수상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1997) 전시가 있다. 파주 통일공원 <10만의 꿈>(1999), UN본부 <놀라움에 찬 세계>(2001), 알리센터 <희망과 꿈>(2005), 순천만 정원 엑스포 <꿈의 다리>(2014),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앞 <네 개의 신전>(2024) 등의 설치 작품이 있다. 대표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로는 광화문 복원 현장 가림막 <광화문에 뜬 달>(2010),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달이 뜬다>(2010), 뉴욕한국문화원 <한글벽>(2024) 등이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강익중의 지속적인 공공미술 활동의 일환으로, 세계인의 참여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예술적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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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복원 현장 가림막의 야경 모습. 달항아리 작품의 연결로 제작한 작가의 재능기부작

“아들이 세 살 때 한글을 가르치려고, 크레용으로 모음과 자음을 나무판 위에 그려봤어요. 그렇게 그리고 보니 한글이 사각형 안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물 흐르듯 획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죠. 사실 한글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정신 때문이라기보다 순전히 조형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쓰고 있어요.”강익중은 일상의 삶에서 한글의 조형적 요소에 담긴‘연결’의 원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작품에 담게 된다.

2004년 9월 일산 호수공원에서 전 세계의 어린이 그림 13만 점을 붙인 애드벌룬이 오프닝 전날 바람이 빠져 한쪽으로 기울어지던 순간, 그는 순간적으로 어릴 때 보았던 달항아리를 생각해 냈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모두 달항아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욕에 돌아온 후 바로 작은 달항아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큰 달항아리, 새, 바람, 물소리가 들어간 입체 달항아리까지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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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중 달항아리의 다양한 버전

“달항아리에는 어릴 적 고향 언덕 위에 뜬 파란 하늘, 해 질 녘 동네 모퉁이를 돌다 본 분홍 하늘이 있어요. 달항아리는 이리 봐도 순박하고 저리 봐도 넉넉해요. 원래는 둘이었지만 불 속을 뚫고 나와 하나로 합쳐진 우리의 모습이죠. 달항아리와 한글은 비슷한 데가 있어요. 모음과 자음이 붙어서 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달항아리도 위와 아래가 따로 만들어지는데 불가마를 통과하면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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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와 한글에 담긴 연결의 원리

“예술은 잠자는 내 영혼을 철학이라는 바늘로 깨우는 겁니다.(…) 그 바늘로 찔러야 해요.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해요. 창문으로 보는 거예요. 하늘은 파랗다. 새가 우는구나. 그것부터 하나씩 모아나가는 겁니다.(…) 예술은 흔들어 깨워 연결시키는 건데, 결국 내가 서 있어야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연결되어 작업이 생명성을 갖게 되죠.”

강익중에게 예술은 ‘흔들어 깨우는 것’, 그리고 ‘이어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살갗에서부터 우주 끝까지 꽉 차 있는 생명성을 표현하고자, 좀 더 연결된 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작업으로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를 시작하게 된다.

2025년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KF XR갤러리(2025. 3. 31 – 9. 2)에서 선보이고 있는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는 강익중이 일상에서 감각해 낸 ‘연결’의 원리가 AI를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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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의 메인 화면

이 작품은 뉴욕한국문화원의 글로벌 공공미술 프로젝트 <한글 벽>(2024)에서 출발한다. <한글 벽>은 한글의 조형성과 세계성, 공동체성을 연결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5단계 제작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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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국문화원 신청사 벽에 설치된 '한글 벽'

1단계에서는 “내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Things I Love to Talk About)”라는 주제로 온라인 접수 시스템과 자동 번역 기능이 포함된 글로벌 웹사이트를 구축했다. 2단계에서는 전 세계 누구나 공식 웹사이트(www.hangeulwall.org)를 통해 참여하도록 했다. 3단계에서는 전 세계 50개국에서 약 7,000여 건의 한글 문장을 접수하여 강익중과 전문가 심사팀이 온라인 투표 시스템을 병행하여 디지털상에서 문자 배열, 색상 조화, 메시지 감성 분석 등을 반영한 최종 1,000건을 선정하였다.

4단계에서는 선정된 1,000개의 한글 문장을 3인치의 정사각형 타일로 제작하고 디지털 UV 프린팅 방식으로 고해상도 색상을 재현하여 타일별 QR코드를 삽입하고 참여자가 자신의 작품 위치를 추적 가능하도록 했다. 5단계에서는 뉴욕한국문화원 신청사(新廳舍) 아트리움 벽면(세로 22m×가로 8m)에 설치하고 공식 웹사이트에서 전체 벽화 구성 온라인 뷰어를 제공하여 참여자가 본인 작품을 SNS로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분리와 분열의 장벽으로 여겨져 왔던‘벽’이,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한글 벽’으로 이미지가 전환된 것이다. 또한 단순한 예술 작품에 머무는 게 아니라 관객과의 양방향 소통을 촉진하고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예술 과정에 관객을 공동 참여자로 초대함으로써, 예술가와 관객이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창작 과정을 구현해 냈다.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는 이와 같은 <한글 벽>에서 수집된 텍스트를 디지털 이미지로 새롭게 변환한 것이다. 3D 그래픽 솔루션 창작 툴(tool)인 ‘언리얼(Unreal)’로 설계된 디지털 화면과 관객 사이에는 문자(한글/ 영문 선택) 입력용 자판이 인터페이스로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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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체험용 인터페이스(한글/영문 자판) /사진: 김재인

관객은 디지털 이미지에서 생성되는“한글을 입력하시오”,“이름을 입력하시오”라는 안내에 따라, 한글과 이름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면, 그 문자들이 화면에 삽입되어 새로운 한글 벽 화면이 생성되면서 작품 일부로 재구성된다. 이때 화면의 움직임에 따른 효과음이 청각적 요소로 작동된다. 입력 문자를 위해서는 AI의 챗GPT를 활용한 비속어 필터링 기능이 내장돼 있고, 영문 입력은 즉시 한글로 전환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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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직접 참여하여 '강익중, 김재인' 입력 글자를 화면 속에 생성한 모습 /사진: 서수경

KF XR 갤러리의 자료에 따르면, 입력 메시지가 작품의 일부가 되고, 이 메시지는 모두 저장되어 작가에게 전달된다는 점을 관객들이 매우 기뻐했다. 외국인 관객들은 영어로 입력했을 때 바로 번역되어 한국어로 입력되는 작품 컨셉을 공통적으로 매우 좋아했다. “한글의 힘이 이 작품처럼 전 세계로, 나아가 우주로 뻗어 나가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적은 관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강익중의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관객들의 일상적 체험이 담긴 문장들을 수집하고 타일로 제작한 <한글 벽>의 텍스트를, 다시 AI와 디지털 기술로 전환하여 관객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작품의 창작자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자신이 입력한 한 쌍의 한글이 엔터키를 누를 때 효과음과 함께 이미지 화면으로 삽입되어 작품이 새롭게 생성될 때, 관객은 화면을 공동 창작하는 적극적이고 유희적인 협력자로서 재정의 된다. 관객은 작품과 상호작용하면서 감각적 층위에서의 거시적인 인터렉션이 구현된 뉴미디어아트를 체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연결의 원리를 시각·청각·촉각의 통합적 감각으로 구현하고자 기획된 AI와 디지털 기술의 협업 창작물이다.

마노비치는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AI의 지식과 기술은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미시적 규모로 작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시적 규모의 작업이란 무엇일까? AI에 비해 인간만이 신체를 갖고 있으며, 감각은 항상 신체화된다. 감각은 절대적으로 의식적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 따르면,“과거가 현재를 비추는 것도 아니고, 현재가 과거를 비추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란,‘그때’와 ‘지금’이 번개처럼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이다.” AI 시대의 데이터는 알고리즘화된‘과거’이고, 예술가의 미시적 작업은 신체적 감각으로 체험하고 사유하는‘현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란 그 둘이 번개처럼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예술은 이미지를 형성하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인간과 기술이 협업하여 비롯되는 상상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화하는 시대가 되었다. AI 시대의 이미지는 신체로 감각하는 인간과 기술이 협업하여 만들어갈 것이다. 사진의 등장으로 모더니즘의 이미지가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적 질문으로 삶과 분리되었다면, AI 시대의 이미지는 AI와의 협업을 통해 삶과 연결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예술가의 미시적인 신체적 감각이 오히려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는 가능성으로 감각과 환각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이다. 강익중의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는 한글과 달항아리의 연결의 원리에 디지털 기술이 협업하여 열어간 새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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