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방 ②] 우리의 조국은 여전히 '분단'중이다

by 데일리아트

2025년 6월 25일,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매년 6월 25일이면 전국의 모든 학교는 아침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모여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여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6월이 오면 ‘6·25’, ‘통일’의 주제로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를 당연시 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은 끝나지 않고 ‘휴전’이라는 형태로 휴전선을 남겼고, 이제 75년이나 되었지만 우리의 조국은 여전히 ‘분단’ 중이다.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의 한 구절을 보자.

(...)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뿐인가···.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동시대, 특히 2·30대 젊은 세대들에게 분단은 어떤 의미인가? 너무 무거운 질문이다. 이 문제를 자신의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작가 송창이다. 그는 1952년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농사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 조대부중 미술반을 거쳐 조선대 졸업 후, 70년대 말 중앙미술대전에서 <농악>, <한> 등을 출품하여 특선에 당선되었다. 기존 화단은 리얼리즘과 먼 구상회화의 매너리즘이 보편화되던 시대였다. 그는 이런 흐름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졸업 후 1979년 성남 성도 중학교(현 송림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82년 ‘임술년’ 그룹을 만들면서 시대의 문명, 문화에 예술적 반영을 시도한다. 리얼리즘 미술로 접근하면서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을 풀어 첫번째 전시회를 연다. <매립지> 연작에서 문명의 황폐화를 물감 덩어리에 가까운 반추상의 화면으로 표현했다. 마티에르로 조형 효과를 극대화한 작업이었다. 현실문제에 눈을 돌려 작품은 ‘분단 시대’의 풍경으로 옮겨갔다. 이후 작가는 화업의 대부분을 우리시대의 무겁고 힘든 주제에 주목하고 있다.

초여름 밤꽃이 하얗게 핀 날, 송창 작가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광주 곤지암으로 향했다. 때마침 작업실 앞 매실도 몽글몽글 익어가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술년’ 창립 멤버신데, 기획 의도나 창립 시 에피소드 부탁드립니다.

결성이라...서울에 올라온 것이 79년 가을인데 80년 봄부터 서울 친구들 5명, 나랑 대구친구 1명, 그렇게 일곱이 만났어. 나, 이종구, 황재형, 송주섭, 이명복, 박흥순, 전준엽. “야, 우리 새로운 거 한번 해보자” 한 거야. 그때부터 모임을 하기 시작했지. 모임 끝날 때쯤 되면 밤마다 뚜닥거리고 다투고, 정리해 나가고 하면서 한 2년을 다듬어서 전시회를 열었지. 82년 첫 전시가 반응도 참 좋았어. 선언문에서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라 했지. ‘임술년’은 1982년이란 시간성을 넣은 것이고, ‘구만팔천구백구십이’는 우리나라 총면적의 수치, 그러니까 장소성을 넣은 것이지. ‘~에서’는 출발의 의미를 동시에 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라는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그룹을 만든 거지. 지금 여기의 삶을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형상화하여 ‘시대 정신’에 역점을 두고자 했지.

3440_9865_1336.jpg

노동요-3, 1981, 145×112cm ⓒ 송창

3442_9875_4243.jpg

매립지-신도시, 1982, 162x130cm. ⓒ 송창

87년 8월 부산 해인 화랑에서 전시를 끝으로 ‘임술년’을 해체했는데, 그때 들어왔던 신입 두 명이 억울하다며 엄청나게 투덜대기도 했어. 86년에 그림마당 '민'에서 개인전도 열고, 88년에는 이명복이랑 이종구, 황재형이랑 다시 모여 《4인의 우리 땅 동행》전을 하며 또 몇 년을 함께했지. ‘동행’을 통해 나는 우리 땅에서 분단의 풍경, 이명복은 미군과 기지촌의 풍경, 이종구는 고향인 서산 오지리의 풍경, 황재형은 태백에서 탄광촌의 풍경을 그렸지. ‘우리 땅’을 제대로 바라보고 현실을 캔버스로 옮긴 거지.

3440_9867_3736.jpg

민통선의 농번기, 1986, 227.3×181.8 cm ⓒ 송창

3440_9869_400.jpg

인간개조, 1987, 205×131 cm ⓒ 송창

-‘현실과 발언’과 더불어 민중미술 1세대 이십니다. 당시의 세평은 어떠했을까요?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이랑 우리 '임술년'을 민중미술 1세대라 하지, 대부분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 작가들이었어. 기존 화단에 무력감, 허구를 떨쳐 내려 애들 썼지. '현발'이 우리보다 빨리 시작 했으나 서로 다른 맥락을 갖고 작업을 했지. :현발'은 '시대 고발'에 초점을 맞췄고 '임술년'은 ‘시대 정신’을 이야기하고자 한 거야.

그때의 평가들? '임술년'이든 '현발'이든 당시의 평가들은 그림도 아니라 했어, 하물며 같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무시했는 걸.

-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80년대 이전에는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했고, 미술계에서도 분단이 자신과 이웃과 민족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생각해 볼 계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80년대 전까지 분단은 절대적인 금기어였습니다. 그 와중에 선생님은 '분단'이라는 주제에 한발 앞서 계셨습니다. '분단'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그랬지, 절대적인 금기어. 80년대 들어와서 민중 의식 고양과 민족적 생존권과 주체성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분단은 시대적 모순이며 우리가 풀어야 할 현실 과제로 생각한거야. 운동권에서 부터 불어온 통일에의 사명을 공유하게 된 것은 85년 무렵일 거야.

역사성이다! 풀고 가야 할 근원이다! 분단의 구조가 결국은 죽음의 구조라는 것을···. 단순한 풍경에서, 우리 땅이 '작전지구'라는 위협을 알리고 싶었지. 그것과 공존하면서 우리 삶이 되어 버린 것을 표현하려 했지. ‘이념’의 갈등으로 생긴 엄청난 사건, 동족 간의 전쟁, 학살, 끊임없는 유혈···. 결국 ‘이념’이라는 것이 소수 몇몇 기득권 세력의 권력을 위해서 생겨난 건데···. 이전엔 우리에게 ‘이념’이란 것이 없었잖아. 그것을 기억하고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3440_9870_4919.jpg

상사리 고개, 1986, 227×181 cm . ⓒ 송창

- 90년 이후에 화법의 변화를 보입니다. 《분단 시대의 풍경화전》(1991), 《흐르지 않는 들녘》(1994) 등의 전시가 대표적이라 생각합니다. 인물을 제외하고 풍경 자체만으로 거대한 주제를 담고자 하신 계기나 이유가 궁금합니다.

DMZ 답사를 수없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기괴하고 억제된 땅에 갔었어. 답사라고 갔지. 자유롭게 홀로는 들어갈 수 없는, 그 불편한 우리의 땅을. 허가를 받고 군인들의 통제하에서만 다닐 수 있는 우리의 어두운 대지를 돌아봤지. 그곳, 찢겨진 산하지만 강한 대지 풍경을 담고 싶었어. 큰 의도는 아니었고 돌이킬 수 없는 역사, 기이한 상황이 흐르는 그 땅의 풍경을 풀어내면서 그리된 것 같네.

3440_9871_5525.jpg

임진강- 연천에서(산을 넘고 강을 건너), 1991, 651.5×193.9 cm. ⓒ 송창

전시 도록에서 유홍준 비평가는 이렇게 표현했지.

"그는 시대의 흐름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진국의 화가다. 마치 고삐를 풀어버린 야생마의 추진력이었다. 화면 앞에서 어떤 중압감에 눌리는 일 없이 감정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분단 40여 년간 버려져 있는 땅,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도록 처박혀 있는 땅, 비정한 군화 발자국만이 지나가고 시계 청소로 벌겋게 벗겨져 버린 황량한 산, 그러나 강물만은 변함없이 흘러가는 비무장지대 민통선 부근의 풍경은 찢긴 산하, 버림받은 땅, 외면당한 풍경이었다. 송창은 그 아픔의 상처를 기록하고 증언한다. 자신의 감정은 얘깃거리가 아니라 색감으로 붓 자국으로 덧칠로 개입시킨다"

3440_9873_1350.jpg

징게멍게 너른들, 1994, 194.9 × 130,3 cm. ⓒ 송창

- 긴 화업을 이루는 중 삶의 애환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작업이 다 각별하시겠지만, 특별히 더 마음에 남는 전시나 작품이 있을 텐데요.

1997년에 전시한 것인데···. 설치 작업을 동아갤러리에서 했어, 근데 이 작업들을 하나도 남기지 못해 아쉽지.

《기억의 숲》(1997)이야. ‘솔재거리’라는 고향인 장성 마을 어귀에 있던 곳이지. 지금은 다 베어버려 없어졌지만. 고향 마을로 접어드는 길 어귀의 소나무 숲, 당시엔 이만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백여 그루도 넘게 마을 입구를 감싸고 있었지. 6·25동란 중에 국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내려와 주민들을 수탈하고 이념으로 나뉘어져 집단 학살이 일어나던 솔숲. 장성은 지리산하고 가까워. 빨치산들이 보급 투쟁을 할 때 거점이야. 지리산에서 영광까지 하룻밤 사이에 왔다 갈 때 그 중간이 ‘장성’인 거야.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천지고, 낮에는 경찰들의 세상이었어. 밤에 총 들고 온 사람에게 누구든 음식을 내줄 수밖에 없었고, 낮엔 빨치산에게 부역했다고 고발당해. 그래서 여차하면 죽게 되는 거야. 빨갱이가 되어 이 소나무 숲에 끌려와서 많이 죽었어. 그 '소나무 숲'이 '분단'에 대한 나의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이미지야. 이념의 산 증인 소나무 숲. 그 숲과 그곳의 수많은 사연을 들으며 컸어. ‘태백산맥’의 소설에 있던 내용들이 보성에만 있던 게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에나 그런 숲들이 많다는 거지.

3442_9876_520.jpg

기억의 숲, 1997, 전시실 전경 , ⓒ 송창

그 소나무 숲을 모티브로 삼아 작업한 설치작품이 《기억의 숲》이야. 아주 극단적인 냉전의 양상으로 유지되고 있는 분단은 탈냉전 시대를 지나 오늘날까지 우리 삶의 온갖 층위에서 파괴적인 작동을 하고 있지. 이 작품은 ‘소나무’의 물성에다가 ‘역사’라고 하는 상징성을 넣었어. 소나무의 형상을 구체화 하기 위해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철사를 감고 한지를 한겹 한겹 발라서 수십 장을 발랐지. 채색을 해서 소나무 기둥들을 만들어 매달아 숲을 만들었지. 일제 강점기부터 5·18 광주까지 모든 아픈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서 천에다 출력했어. 학교 수업을 끝내고 밤이 되면 작업실에서 암막을 치고 직접 인화 작업을 했지. 역사적 사건에는 페인팅도 해서 나열했지.

3442_9878_5510.jpg

기억의 숲, 1997, 전시실 전경 , ⓒ 송창

3442_9879_5544.jpg

기억의 숲, 1997, 전시실 전경 , ⓒ 송창

회화와 사진, 판화기법, 설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붙이고 세웠어. 소나무의 여러 형태를 매달아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의 흐름과 거리감에 역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었지. 김구, 안창호, 이승만, 맥아더, 스탈린, 김일성 등의 인물과 해방의 기쁨, 신탁 반대운동, 미-소의 대화, 휴전협정, 5·16과 박정희 등 분단 주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담은 31개 이미지를 잘려진 소나무 둥치 위에 나이테처럼 새겨 붙였지. 아우성치는 소나무 숲, 이념의 증인인 소나무 숲은 나의 고향 ‘솔재 거리’에서 소환한 작품인데···. 보관이 힘들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운 작품이 되었네.

3442_9880_5743.jpg

판문점-휴전선 긋기, 1996_사진 위에 실크스크린_87x80cm. ⓒ 송창


3442_9881_5825.jpg

임진벌에서-광주_천과 사진 위에 아크릴릭_194.5x58cm. ⓒ 송창


전시 도록에서 비평가 이영욱은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원하고 기억하는 일이 필요하다. 망각의 시대에 필요한 일은 그 기억의 욕구에 답하는 일이다. 미술이 역사와 현실을 수납하고 귀환시키는 방식은 기억과의 돌연한 만남의 방식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 어떤 질서 정연한 연속선을 발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의 잔해와 흔적들로부터 불현듯 솟아 나오는 현재를 만나는 방식이다. 80년대를 겪은 사람, 송창은 스스로에게 매우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오늘은 '우직한 화가' 송창 선생님의 이야기와 20대부터 40대의 작품을 만나보았다. 다음 편에는 50대 작품부터 현재의 작업까지 송창 선생님 작품세계를 만나본다.

https://youtu.be/-RAFeYN18cY


[작가의 방 ②] 우리의 조국은 여전히 '분단'중이다 - 민중미술 '임술년'작가 송창1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일상의 리흘라] 여행과 날씨, 그 필연적인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