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에게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 30] - 광희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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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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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은 한양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중 하나로 서울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태조5년 (1396) 8월부터 9월까지 행한 2차 한양도성 축성 공사 때 만들어진 문이다. 다른문들과 다르게 평지에 지어져서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 성문의 이름 광희(光熙)의 뜻은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청계천과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이 문 이름 '빛을 멀리 밝힌다'는 뜻과 다르게, 문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이야기를 알면 한숨부터 나온다. 죽은 시신이 반출되는 문의 용도와 무관치 않다.

한양 도성 안에서 죽은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는 아무 문으로 드나들 수 없었다. 서소문과 광희문으로만 운구했다. 서소문 밖 동네는 '아현'인데, 아이들의 시신을 버리는 곳이라 해서 이 일대를 아이고개, 애고개, 아현이라 한 것이다. 광희문도 시신을 운구하던 문이라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먼저 근대기의 역사를 하나 짚고 가자. 일제가 우리나라를 서서히 침략해 나갈 때인 1907년, 조선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훈련원으로 소집했다. 이에 반발한 대한제국 시위대 2개 대대원이 군대 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정미의병의 신호탄이 된 소위 '남대문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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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을 찾는 모습

일본군은 숭례문 문루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병영을 내려다 보며 가격을 하여 총알이 떨어진 대한제국 군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4명, 대한제국 군인은 사망자만 68명이었다. 이때 전사한 군인 시신들을 일제는 광희문 밖에 버렸다. 아들 혹은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찾아온 많은 아녀자들이 통곡이 광희문을 울렸다.

시대를 거스려 더 올라가면 영조 때는 현재의 노숙인 시설과 비슷한 활인서가 광희문 밖에 설치되어 가난하고 병든한 사람들을 구제했지만, 치료 받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광희문 밖으로 버렸다. 1820년에 창궐한 콜레라, 1866년 병인박해 때 희생된 이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으로 옮겨졌다. 이런 사연들로 광희문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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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거스려 올라가면 병자호란(1636)의 부끄러운 역사와 맞닿는다. 청나라 군대가 밀고 내려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숭례문을 빠져 나왔는데, 강화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항전을 불사한다고 수도 한양을 버리고 남한 산성으로 옮긴 것이지만, 47일 만에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했다. 그후 송파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두고구'의 예를 갖춰, 우리 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일을 당했다. 인조는 350여 년전 이 문을 통과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문을 바라보니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시구문이라고 하니 으스스해요.”

생각이 잠긴 나에게 큰 손자 형주가 말을 걸어온다. 나의 역사적인 이야기는 들은체만체 시구문이라는 말에만 생각이 꽂혀 무서웠나 보다. 서로 부둥켜안는 시늉을 했다. 빛을 의미하는 광희문이 시신들이 나가는 음습한 문이 되었다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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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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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내부 광경

한양 도성의 문은 네 개의 대문과 그 사이사이에 네 개의 소문으로 구분했다. 사대문은 정문, 사소문은 간문이다. 정문과 간문은 입직하는 군사의 위계에서 차이가 있었다. 정문에는 정4품인 호군과 30인의 수문병이 근무했고, 간문에는 몇 단계 아래인 종6품 부장 2인과 수문병 10명이 근무했다. 문을 열고 닫는 절차도 선전 표신과 부험(출입증)이 모두 필요한 정문과는 다르게 개문 표신만으로 열 수 있었다. 다만 문을 계속 열어 두어야 하는 날에는 광희문에도 선전 표신이 있어야 했다.

“선전 표신이 뭐에요?”

“관청에서 발급하는 표식으로 쌍방이 각자 지니고 있다가 맞춰서 인증하는 방식이지. 부신(符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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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경 광희문의 모습

이 문은 천주교와도 관계가 깊다. 1801년 신유박해로 수많은 천주교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당했을 때, 친지를 찾지 못한 시신들이 이 문을 통과해 바깥에 버려지기도 했다..

광희문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원래 자리에서 15m 정도 떨어진 현재 자리에 복원되었다.

지하철 2, 4, 5호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2호선에 가까움)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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