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컷
1961년은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해로 기록된다. 우리나라 대표적 영화제인 대종상영화제가 시작되었고,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에게 회자되는 영화들이 대거 개봉되었다. 그해 2월 15일, 국제극장에서 개봉한 〈마부〉(감독 강대진), 〈장희빈〉(감독 정창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감독 신상옥), 〈오발탄〉(감독 유현목) 등이 모두 1961년 작이다.
1961년에는 우리 영화 제작 환경이 급속도로 좋아지고 평균 제작비가 늘어나 대작이라 부를 만한 영화들이 늘었다. 신년 벽두인 1월 28일 개봉한 <성춘향>(감독 신상옥)은 관람 인원 38만 명을 기록해서 우리 영화도 잘 만들면 외화를 누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영화 포스터
왜 1961년에 이런 경사스러운 일들이 많았을까?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한 해 전인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독재 정치에서 억눌렸던 문화 산업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이승만 시절 지속되었던 사전 영화 검열이 폐지되고 민간 심의기구인 영화윤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961년 좋은 영화가 대거 개봉한 것에는 검열 폐지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5·16 직후 영화법이 개정되어, 이듬해인 1962년부터 영화 산업을 옥죄었다. 표면적으로는 난립한 군소 제작사들을 정비한다는 이유로 촬영 장비와 시설을 갖춘 업자들만 제작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내면에는 집권에 성공한 군사정권이 문화를 통제하려는 수단이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두 영화 〈오발탄〉과〈 마부〉는 당시 우리 사회의 상황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가난한 도시 빈민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오발탄〉과 도시 빈민의 어두운 삶을 해학과 해피엔딩으로 보여준 <마부>. 유현목의 <오발탄 >은 '북으로 가자!'는 극중 주인공 엄마의 대사와 지독한 가난의 설정 등으로 검열을 당해 개봉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마부>는 상대적으로 검열로부터 안전했다. 추후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면, 〈마부〉와 같은 이러한 스타일의 영화는 검열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전한 모델로 전유되었다.
(좌) 막내딸로 분한 엄앵란 (우) 황해(가수 전영록의 아버지) /출처: 영화 스틸 컷
영화 〈마부〉는 도시빈민이 겪는 가난의 서사가 코미디로 용인된다. 가난은 신분 상승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하는 과정으로 치환된다. 이런 영화의 흐름은 이후 전개될 군부독재 시대에, 가난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를 선도한다. 즉, 가난하지만 성실하게만 살면 행복할 수 있고, 게다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가난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판타지를 심어주었다.
이런 가족 공동체의 훈훈한 이야기는 영화를 받치는 든든한 기둥이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함께 극복하는 가족의 서사는 우리 사회의 버팀목이다. 지금도 각종 드라마를 보면 대가족으로 구성된 가족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외국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우리 문화의 특성이라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와 마차는 근대와 전 근대를 대표하는 문명의 충돌이다. 아마도 1950년대까지 사람들의 이동 수단으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자동차와의 대결에서 마차는 패하고 뒤로 물러난다. 이런 시대상이 영화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줄거리
마부 하춘삼(김승호 분)은 마차로 짐을 날라다 주는, 지금으로 말하면 배달노동자다. 그런데 그가 끄는 말도 실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다. 마주가 따로 있어 운반비의 일부를 마주에게 갖다주면 손에 쥐는 돈은 별로 없다. 홀아비로 자식 넷을 건사하는 가장 춘삼의 수입은 차츰 줄어든다. 점점 늘어나는 자동차에 밀리기 때문이다.
큰 딸 옥녀는 언어장애인이다. 출가했으나 남편의 폭행 때문에 항상 쫓겨 돌아온다. 집안의 유일한 희망은 장남 수업(신영균 분)이다. 그는 만년 고등고시 준비생이다. 아버지 춘삼은 현재의 가난을 아들에 대한 기대로 극복한다. 둘째 딸 옥희(엄앵란 분)는 이런 집안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허영에 들떴다. 좌충우돌 방황하는 사춘기 학생 대업. 이들이 춘삼이가 건사하는 자녀들이다. 1960년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출산율이 6명인 점을 고려하면 4명의 자녀는 적은 편이다.
자식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아버지에게 장남 수업은 늘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서 수업은 말을 자신이 대신 끌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공부해서 고등고시에 합격하라는 말만 한다. 힘든 가계를 위해 고리대금업을 하는 친구 김서기에게 돈을 빌리지만 빚만 늘어간다.
장남 수업은 고시 합격에 자신이 없고, 허영에 들떠 사기꾼에게 걸려든 옥희, 막내 아들 대업의 사춘기 방황은 끝을 모르고, 이에 따라 아버지 춘삼의 고뇌는 깊어간다. 그의 유일한 기쁨은 마주의 집 식모 수원댁과의 로맨스다. 그런 와중에 언어장애인 큰딸 옥녀가 생을 비관해 자살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름에 빠진 춘삼은 마주의 자동차와 부딪쳐 사고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마주의 눈밖에 나서 말마저 빼앗긴다.
안타깝게 사정을 지켜보던 수원댁은 자신의 돈을 융통하여 춘삼에게 말을 되찾아준 뒤 홀연히 떠난다. 고등고시를 치른 수업이 대신 말을 맡아 집안의 경제를 책임진다. 바람났던 옥희도 가정으로 돌아오고,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 대업도 어느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희망인 고등고시 합격자가 발표되는 날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광화문 중앙청에 수원댁과 가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제작자 이화룡
영화 마부의 제작을 맡은 화성영화사의 대표는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화룡이다. 그는 이미 평양에서 박치기로 이름이 있는 깡패였고 같이 월남한 시라소니하고는 오랜 친구다. 잽싸게 큰 기합을 지르며 상대방의 머리를 박는 위력적인 박치기가 그의 장기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의 실력자 이기붕이 이화룡을 스카우트하려 했다.
1960년대 전후의 시대상은 정치와 깡패가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의 관계였다. 그러나 이화룡이 이기붕의 제안을 거절하여 동대문의 주먹 이정재가 대신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이화룡의 누나 이성룡이 명동에서 고급 중국집을 운영하며 동생을 지원해서 다른 깡패와 다르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장희빈 포스터, 1대 장희빈 역은 김지미가 했다.
같은 이북 출신이라 친하게 지낸 시라소니를 동대문파 이정재가 공격해서 이정재와는 대립 관계다. 결국 이화룡은 자유당 정권에서 뒤를 봐주는 동대문파 이정재에 의해서 주먹계에서 강제 퇴출당한다. 그리고 뛰어든 것이 영화판이다. 1960년부터 1967년까지 〈마부〉를 제작한 화성영화사를 운영한다. 화성영화사에서 이화룡이 제작한 작품으로는 1대 장희빈으로 주가를 올린 김지미 주연의 1961년 작 〈장희빈>, 이만희가 감독으로 데뷔한 〈주마등〉 등이다. 이후에는 영화계에서도 손을 털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고 1984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손을 거쳐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이화룡의 일생을 그대로 카메라로 쫓아가면 그의 인생 역정이 영화와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로로 메이저 영화상 수상작
<마부>는 제1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특별 은곰상을 수상하며 당시 한국 영화계가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수상 직후 한 일간지의 인터뷰에서 감독 강대진은 작품이 성공한 후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같은 흥행 지향적인 영화의 의뢰가 많았지만 "우리 영화가 버텨왔던 영역, 나의 심성에 맞는 서민, 그것도 토착적 서민의 세계를 그린 작품을 고집하겠다"고 말했다.
영화에 보이는 서울의 모습
영화는 예술이나 오락적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배경에 등장하는 장소는 도시공학적 측면에서 유용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가 그대로 시대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영화 〈마부〉는 1960년대 초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고 있다.
영화 '마부' 의 한 장면 출처: 영화 스틸 컷
60년이 훨씬 지났는데 현재의 옥인길과 영화의 장면이 전봇대의 위치도 똑 같다. /사진: 한이수
영화 제작진 소개 자막 이후에 등장하는 막내아들 대업이 자전거를 타고 쫓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어디일까? 길 양옆에 있는 건물 사이로 길은 S자 형태로 휘어져 있다. 다른 길에 비해 자동차도 다닐 정도로 폭이 넓다. 자세히 보니 멀리 보이는 인왕산의 윤곽으로 봐서 '옥인길'이다. 지금 통인시장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길은 하천이었는데 물길을 덮어서 도로로 만들었다. 누상동과 누하동을 가로질러 잘 만들어진 복개길로 자전거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면과 지금 옥인길을 비교해 보니 길옆에 휘어진 전봇대와 오른쪽에 솟은 집은 박노수 가옥이라는 것을 이 길을 다녀본 사람이면 안다. 자전거가 넘어진 곳은 예술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고 하는 '누하5거리'다. 60여 년 전의 길이 변하지 않고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자동차의 본네트 위로 보이는 마부의 모습. 멀리 보이는 기와지붕이 박문사로 쓰였던 신라호텔 영빈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출처: 영화 스틸 컷
흥화문 /출처: 위키백과
부잣집 남자와 막내딸 옥희(엄앵란 분)가 자동차를 타고 간다. 갑자기 나타난 마차와 부딪힐뻔한다. 마부는 아버지 춘삼, 춘삼은 힐끔 차 안을 쳐다보지만, 차에 탄 막내딸은 모습을 숨긴다. 근대를 대표하는 자동차와 근대기 이전의 운송 수단인 마차가 함께 등장한다.
자동차 본네트 위로 보이는 우뚝 솟은 큰 기와 문이 보인다. 이곳은 어디일까?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은 원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활용되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 할 때의 그 '박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절명하자,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높은 곳에 그를 기리는 원찰을 지어 추모했다. 하필 박문사의 문을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떼어다 달았다. 지금 그곳은 신라호텔이다. 역사는 흘러가고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나라를 빼앗은 원흉인 이토우 히로부미를 기리는 문으로 쓰였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서울역 주변 모습
전국에서 서울로 모이는 화물을 옮기는 모습이 등장한다. 트럭보다는 기차를 통해 전국의 화물이 서울역으로 모인다. 서울역으로 모인 화물은 마차나 삼륜차를 통해 서울 곳곳으로 이동한다.노량진으로 수산시장이 이전한 1975년까지 서울역 앞에 수산시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 어시장으로 존재했다. 아마도 극중에서 춘삼과 같은 마부들이 이곳에 쌓인 화물들을 마차에 싣고 날랐을 것이다. 지금도 이곳 주변에는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들이 많다.
춘삼과 수원댁의 뒤로 만초천이 보인다. /출처: 영화 스틸 컷
춘삼이 수원댁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할 때 보이는 곳은 철공소가 많이 있었던 서계동 지역이다. 서부역 뒤편, 서부역에서 숙명여대 쪽으로 난 길이다. 이길은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초천이 흐르는 하천이었는데 지금은 복개했다. 한양도성 바깥으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물길이 만초천이다. 지금은 그 흔적도 살펴볼 수 없으나 이 물길은 원효대교 쪽으로 빠져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1966년 만초천을 복개했다. 영화를 촬영할 1960년에는 천을 덮지 않아, 춘삼과 수원댁이 만초천 다리 위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이곳은 지금 통일교 본부가 있는 배다리 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영화 마부를 통해 서울의 많은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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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시대 읽기 ⑨] 1961년, 힘들었지만 따듯했다 - 강대진 감독의 '마부' < 영화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