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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기념] 붓으로 그린 국가, '민족기록화

by 데일리아트

미술관을 나온 민족기록화, 엽서가 되다

국가의 이념과 예술가의 붓이 만나 탄생한 55점의 작품들. 전시가 끝난 후,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 이미지들은 시공간을 넘어 국민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자 했다. 그 힌트는 손바닥만 엽서에 있었다.

작품이 엽서가 되다

《민족기록화》전에 출품된 500호, 1000호 캔버스에 담긴 장면은 관람객을 압도했을 것이다. 미술관이라는 엄숙한 공간에서 거대한 그림과 마주하는 행위는 하나의 비일상적인 사건이자 특별한 경험이었다. 국가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통해 관람객에게 국가 서사의 장엄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회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다. 전시가 끝나면 그림들은 철수되고, 그 강렬했던 시각적 충격은 소수 관람객의 희미한 기억 속에만 머물게 된다. 그러나 정권의 목표는 일시적인 감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심고자 한 민족과 반공의 기억은 대중의 일상 속에 뿌리내려야 했다. 어떻게 하면 미술관의 높은 벽을 넘어, 이 메시지를 모든 국민의 집 안까지 배달할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기념 엽서의 복제와 유포에 있었다.

거대한 원화가 손바닥만 한 엽서로 축소되는 순간 이미지의 성격은 완전히 바뀐다. 미술관의 대작은 이제 책상 서랍 속 기념물이 된다. 압도적인 경외감은 사라지는 대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친밀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제 이미지를 보는 행위는 더 이상 특별한 관람이 아니다. 편지를 쓰거나, 책갈피로 쓰거나, 벽에 무심코 붙여놓는 일상의 행위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의 선전 전략은 교묘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사이, 엽서 속 이미지를, 그리고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특정하게 편집된 역사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엽서는 단순한 전시 기념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이데올로기를 실어 나르는 은밀한 도구였다.


회화와 공공조각, 기억을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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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혁명 기념탑' 사진, 1962 / 출처: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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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 '박정희 장군의 혁명군지휘' 기념 엽서, 1967 / 출처: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민족기록화의 영향력을 동시대에 건립된 기념 조각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광장이나 주요 공공장소에 세워진 위인 동상이나 기념비와 같은 조각이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될 기회가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복제를 통해 기념 조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침투했다.

기념비, 기념상과 역사화는 역사를 재현하고 기억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각기 다른 매체적 특성을 활용했다. 기념 조각은 영속성과 기념비적 성격을 통해 특정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고 국가의 공식 서사를 선언하는 역할을 한다. 주로 영웅적 인물이나 상징적 사건을 하나의 응축된 형태로 제시하며, 공적 공간에서 집단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 메시지는 웅장하고 단일하며 일종의 선포에 가깝다. 반면 회화는 보다 복합적인 서사를 담을 수 있는 매체다. 민족기록화는 특정 장면을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담아내어 사건과 인물의 감정을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회화들이 복제되면서 그 파급력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이다. 복제된 이미지는 미술관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개인의 서랍, 앨범 등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왔다.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이미지가 되어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었다.

현재 《민족기록화전》에 출품된 작품은 대부분 소재를 알 수 없다. 이 거대한 그림들이 어떻게 역사를 편집했는지 오늘날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제작된 기념 엽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원본의 행방이 묘연한 지금, 이 엽서들은 당시의 시각적 기록을 품고 있는 거의 유일한 창(窓)이다. 이러한 엽서는 단순히 이미지를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명 텍스트와 함께 인쇄되어 이미지를 해설했다. 이 텍스트는 작품 해석의 틀을 제공하며, 나아가 작품의 소비 방식을 결정하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박항섭의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 기념 엽서를 들여다보면, 국가가 어떻게 역사를 선택하고 편집하여 대중의 기억을 만들려 했는지 그 치밀한 전략이 드러난다.


비극을 영웅담으로: 박항섭의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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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섭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 기념 엽서, 1967 /출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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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데스포, '끊어진 대동강 철교', 1950 /출처: AP통신

이 사례는 이미지 전략의 핵심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항섭의 그림은 폭파로 끊어진 대동강 철교의 철골 구조물에 위태롭게 매달려 강을 건너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1950년 AP통신의 종군기자 맥스 데스포가 촬영해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은 바로 그 사진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다. 하지만 그림과 사진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정반대이다. 맥스 데스포의 사진이 포착한 것은 전쟁의 비극 그 자체이다.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UN군이 다리를 폭파했고, 그 결과 오갈 데 없어진 민간인들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참상을 포작한 것이다. 사진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내몰린 무고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한다.

박항섭의 캔버스는 이 맥락을 1차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복제한 엽서는 하단에 설명문을 덧붙여 그 의미를 확정짓는다. 엽서는 이 장면을 “국군의 입성과 더불어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평양 시민이,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몸서리치는 공산치하를 벗어나 자유를 찾기 위하여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필사적으로 건너오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UN군의 비인도적인 작전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 상황은 삭제되고, 오직 자유를 향한 거룩한 탈출이라는 영웅적 서사만 남는다. 작품과 전시 공간이 사진의 원래 맥락을 바꾸고, 엽서의 글귀가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로써 사진의 원본이 담고 있던 비판적 메시지는 지워진 채, 반공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강력한 아이콘이 탄생했다.

《민족기록화전》은 엽서라는 매체를 통해 미술관을 넘어 일상에 개입하며 국가가 의도한 역사 해석을 전파했다. 복잡한 현실의 역사는 선명한 선악 구도로 편집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지금, 민족기록화를 다시 읽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선전 미술을 되짚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우리가 쌓아 올린 80년의 역사 속에서, 국가가 어떻게 스스로의 역사를 쓰고 기억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거대한 서사 앞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되묻는 일이다. 민족기록화는 권력과 예술, 국가적 대의와 개인의 욕망, 역사적 진실과 이념적 각색이 복잡하게 얽힌,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흥미로운 일면이다. 추상과 단색화라는 빛나는 주류 서사 뒤에 감춰졌던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더욱 집요한 탐구와 다각적인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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