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뼈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심포니 - 이정빈 작가

[청년 작가 열전 ⑨]

뼈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그리는 작가 
“삶은 죽음의 동반자요, 죽음은 삶의 시작이니 어느 것이 근본인지 누가 알까. 삶이란 기운의 모임이다. 기운이 모이면 태어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다. 이와 같이 죽음과 삶이 같은 짝임을 안다면 무엇을 근심하랴.”  - 장자
이정빈, 속! Soak!, 2022, 캔버스에 유화, 40.9 x 60.6 cm

우리 몸은 206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몸을 지탱하는 건 개인의 의지가 아닌 뼈다. 뼈는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들끓음을 내포한다. 뼈는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시간이 흘러 모든 껍데기를 벗고 나서도 ‘나라는 존재’의 흔적을 세상에 남겨 두려 애를 쓴다.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 아니라 뼈이기 때문인 걸까?


몸은 자연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인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활동의 질서는 몸 바깥 환경에서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생명체들과 근원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할 본연의 가족이다.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의 결에 발맞추어 손짓하는 나뭇가지, 매일 인간 몰래 약속된 법칙을 지키며 자비로운 햇살을 내어주는 태양, 우리 몸의 60%가 그렇듯 지구의 70%를 덮는 저 광활한 바다. 그리고 이 모든 경이로움 위를 자유롭게 뛰노는 우리 인간은 모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 이러한 인간의 몸(뼈)과 자연 공통의 본질을, 그 보이지 않는 ‘죽음과 삶의 춤’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작가가 있다. 이정빈 작가를 만난다.


-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유화를 그리는 이정빈이라고 합니다. 저는 인체의 여러 부분을 소거한 이미지를 모티프로 작업하고 있고요. 그 과정에서 뼈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곤 합니다. 그리는 방식과 주제가 오묘하게 겹치도록 적절한 조합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타법(打法)"(2024, Sywisy) 전시 전경. 왼쪽부터 '저녁'(2024), '뒤피 숲'(2024), 이정빈 작가


장춘(長春)캠프, 2024, Sywisy, 울산

- 작품에 ‘인간의 뼈’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론 뼈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계기로 뼈가 그림의 핵심 주제가 되었고, 작가의 시각과 삶에서 뼈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 부탁드린다.


뼈 작업은 2019년부터 시도하고 있는 소재인데요. 사람을 그려볼까 하는데, 성별과 인종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탐구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볼 수 있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보지 않음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재 저의 그림들은 지칭하는 정보 없이 무언가를 제시하는 과정의 기록이고요.

작업실의 모습

뼈가 흥미로운 건 공부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함의를 만나게 되는 점 때문입니다. 우선 죽음, 질병의 상징인 바니타스(Vanitas) 정물로 알려진 것 같아요. 두개골을 상상하기만 해도 머릿속에 미라, 원효, 예능 프로의 낭패감이 짙은 마크가 떠오르고 저조차도 죽을 것처럼 힘들다는 뉘앙스를 전하며 해골바가지를 그릴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시각을 뒤틀어 살아있음의 관점에서 보면 뼈는 숨 쉬고 걸어 다니는 사람의 몸속에 무조건 함께하는 것이에요. 몸 가장 안쪽의 지지대가 되거나 무언가를 지키고 있죠.

이정빈, 기대, 2020, 캔버스에 유화, 30 x 30 cm

살아있는 인간 모두가 단단한 뼈를 지니고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져요. 그리고 '뼈저리게 경험했다, 뼛속 깊이 새긴다'는 문장처럼 우리나라에는 뼈를 사용한 표현이 꽤 많은데요. 기형도 시인의 「소리의 뼈」(『입 속의 검은 입』, 문학과 지성사, 1991)를 읽고 나면 어쩐지 귀가 바짝 예민해지듯이, 단어 자체가 곳곳의 깊은 지점을 건드려서 좋아요. 이미지적으로, 상징과 언어적으로 제게 넓은 장소를 만들어주는 것이 뼈예요. 한편으로는 작가로 살아갈 시간의 초입에서 '뼈'를 다루는 게 일종의 첫걸음, 첫 단계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체 드로잉을 배울 때 해부학부터 시작하는 것처럼요.


- <Jogging>(2019), <Toes To Bar #2>(2020)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자연과 사람의 뼈를 따로 구별 짓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배경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살갗과 근육을 걷어내고 뼈만을 자연 속에서 은밀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또한 작가에게 자연과 뼈는 어떤 관계인가.

이정빈, Jogging, 2019, 캔버스에 유화, 112 x 193.9 cm



이정빈, Toes To Bar #2, 2020, 캔버스에 유화, 72.7 x 72.2 cm

두 그림의 상황 자체는 바깥에서 뛰거나 철봉 운동을 하는 뼈를 떠올린 것이에요. Figure & Ground, 주제와 배경의 조율을 고민하는 건 평면 회화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경우 겉을 걷어내고 본질을 보려는 사유를 형식적으로도 전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 같아요. 저는 먼저 붓을 사용해서 물감을 칠해 두고, 고무 스퀴즈를 써서 물감의 일부를 긁어내고, 스퀴즈에 묻은 물감을 다시 묻혔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요. 뼈와 배경이라는 앞뒤의 요소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완성될 화면을 찾아갑니다. 그러니까 뼈를 뼈처럼 잘 그리겠다거나, 자연 속에 숨기려 한 게 아니라 그저 레이어를 교란하려는 의도만을 밀고 나갔을 때 만난 결과물이에요.


자연은 <Jogging>(2019) 을 계기로 작업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요. 어느 순간 사람의 골격과 자연이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이더라고요. 숲의 뼈는 나무인 것 같았거든요. 나뭇잎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이파리는 사람의 갈비뼈처럼 느껴졌고요. 또 전에는 공원, 풀밭, 바다 등 어렴풋한 풍경으로 대하던 환경을 점점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데요. 최근 울산에서 약 한 달간 레지던시를 진행하고 참여한 전시 《타법(打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시에 건 작품 대부분은 특정한 장소를 그렸고 그 장소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사람과 뼈로는 어려운 것이 자연으로는 가능한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어요.


- 재료, 기법, 구도, 색, 주제를 비롯한 전반적 작업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면 어떤 측면에서 보든지 이미 개인의 개성이 묻어난다고 여기는 편인데요. 그래도 한 가지를 고르자면 기법이 아닐까요. 저의 그림을 추상으로 대하는 분도 있는데, 저는 제가 정확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그려진 것들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다루는 방식이 특징적인 부분이고요. 색을 부드럽게 섞어서 한 붓에 여러 색을 칠하면 개체 사이에 거리감이 생겨요. 스퀴즈로 긁은 자국은 면 안쪽에 또 다른 면 혹은 점이 되고요. 스퀴즈를 날카롭게 세워서 찍으면 선으로 남습니다. 그 사이를 다시 붓으로 채우면 안과 밖, 앞과 뒤, 레이어의 순서를 섞을 수 있어요.

이정빈, 인셀 홈브로이히(Insel Hombroich), 2024, 캔버스에 유화, 130.3 x 193.9 cm

제가 원하는 만큼 물감을 남기기 위해서 밑바탕이 되는 젯소의 레시피부터 따로 만들고 있지만, 우연성이 꽤 많이 개입하는 그림이라고도 생각해요. 우연인데 운명적이면 기쁘잖아요. 그렇게 조형의 기본 요소인 점, 선, 면을 제 방식으로 운용하고, 갖고 놀고 있다는 느낌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마침, 앞서 언급한 전시 《타법(打法)》이 제목의 뜻 그대로 작가의 기법에 주목한 전시였고요. 캔버스 위에서 물감의 두께와 점도를 조절하여 표면의 일관성을 구축하는 선택의 모음이 작업의 메커니즘을 아우르고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정빈, 인셀 홈브로이히 (Insel Hombroich) 부분, 2024, 캔버스에 유화, 130.3 x 193.9 cm


- 평소 취미로 무엇을 하고, 작품 활동의 영감은 어디서 받는가.


회화는 아무래도 정적인 노동이라서,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춤을 취미로 배우고 있어요. 혼자서 하는 창작과 달리 무언가를 새로 익힐 때 집중하는 쾌감과 긍정적인 공동체의 교류를 즐기는 것 같아요. 오래된 취미로는 아직 300편 정도 남은 영화 1,000편 보기 리스트가 있고요. 자본과 인력이 잔뜩 동원된 작품, 반대로 소수의 손길이 닿은 작품의 탁월한 장면들을 참고 자료로 모아 둬요. 그리고 그것들을 다르게 연출하면 어떨지 상상하곤 해요. 때로 취미가 일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사건으로 자리해 작업의 토대가 됩니다.


- 작품을 할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그리고 작품 속에 작가의 삶이 녹아든 요소가 있는지 궁금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조명하면 좋을지 조율하는 시간이 대부분이고요. 그림을 완성하면서는 도통 마음에 안 들고 어려울 때도 있고, 새로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설렐 때도 있어요.

이정빈 작가와 'Light'(2023)

작품에 녹아든 삶의 요소라면, 미술은 결국 보여지는 업이라서요. 전시한다고 하잖아요. 작가가 꾸리는 삶의 전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과 유사한 것 같아요. 몸에 대한 호기심, 다쳤을 때 찍은 X선 사진 속 뼈, 크로스핏과 요가, 제철 음식, 유독 짙게 남은 기억이 그림에 속하기도 하겠죠? 각기 다른 컨텐츠로 북적이다가도 고요한 작업실에서 하기로 결정한 일에 집중하는 게 작업이겠고요.


- 감상자가 작품을 보면서 느꼈으면 하는 감정이나 생각이 있다면?


예전에는 관람객들께 원하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에 가까워졌어요. 어떤 바람을 비워 두고 먼저 말씀해 주시는 감상을 잘 듣고 있어요. 작품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을 허공에 찍고 나니 오히려 제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전해 주시는 분들을 만나곤 해요. 그런데 제게 감상자가 느꼈으면 하는 방향을 기대하는 것과 작업을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범주라서요. 작업에 대해서는 충실히 설명하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정빈, 지리산, 2021, 캔버스에 유화, 145.5 x 89.4 cm

- 기존의 방식과 다른 작업을 할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뼈 다음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가.


현재는 개인전 구상을 비롯하여 작업의 초석이 되는 세계관과 주제를 심도 있게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처음의 관심이 사람이었던 만큼 인물화를 중심으로 자료를 만드는 중이에요. 한편으로는 작업 방향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청년 작가의 여유도 소중히 한달까요. 저는 머니 잡으로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본 작업 외에도 여러 분야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어서요. 지도자로서도, 작가로서도 부지런히 실험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고, 그러한 삶의 다른 축이 작업에 개입되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 만약 작가의 작품이 미술사에 남게 된다면 어떤 내용으로 기록되기를 원하나.


동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말해진다면 좋겠어요. 제가 죽고 난 뒤에 세워질 비석을 20대 때 쓰는 것과 같아서 재밌고 어려운 질문이었네요.

이정빈, 아라 숲, 2024, 캔버스에 유화, 45.5 x 53 cm

- 다음 추천 작가에 대한 소개와 데일리아트에 바라는 점 한 말씀 부탁드린다.


이어서 추천하고 싶은 작가는 정하슬린 작가입니다. 동시대 회화 작가로서 고민하는 지점을 자신의 독특한 감각으로 표현하여 흥미로운 이미지를 제시하는 작가인데요. 데일리아트를 통해 작업 과정과 이야기를 듣는다면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청년 작가를 주목하는 인터뷰로 귀한 공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레이 추천으로 연결되는 청년 작가 열전이 쌓이다 보면 한국의 미술을 조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데일리아트와 더 많은 작가가 함께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플랫폼이 되길 바랍니다.


이정빈


학력

2020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조형예술전공 졸업

2017 Academy of Finearts in Prague, Print Making 교환 프로그램 수료


그룹전

2024 «타법(打法)», Sywisy, 울산

2023 «Drawing Growing», 미학관, 서울

2023 «이주»,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2022 «붉은 새벽녘 지나 푸른 노을»,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2022 «Drawing Growing», 미학관, 서울

2021 «시리얼즈 Serials», 레인보우큐브 갤러리, 서울

2020 «RED SHIRTS», 을지로 오브, 서울

2019 «Scope Scope Scope»,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2019 «Relay Exhibition», 옐로우 베이스먼트, 서울

2017 «Lost and ____», Galerie AVU, 프라하


출판

2021  『마곡 공장장의 아침 Le matin』, 독립출판

2020  『컨티뉴엄: 리버시-액티비즘-레즈비언-사이보그 Continuum: Reversi-Activism-Lesbian-Cyborg』, 문래예술공장


레지던시

2024  장춘(長春)캠프, Sywisy, 울산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7

작가의 이전글 궁중비법을 민간에 사용해 대박 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