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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궁중비법을 민간에 사용해 대박 난 사람들

[브랜드의 문화사]

궁중비법을 민간에 사용해 대박난 사람들


서울의 중심은 어디일까? 인사동에 있는 중앙빌딩 로비에 가면 ‘서울중심석표지석’이 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 조그만 돌 비석이 도성으로 둘러 싸인 한양의 중심이라고 표시되어 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시대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그 때에 비해서 몇 배로 커진 지금 서울의 중심지는 남산타워라고 한다. 그럼 정치의 중심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광화문 일대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이 백악산 앞에 자리잡았고 그 앞으로 쭉 뻗은 육조대로, 좌우에 줄 지어선 많은 관아들이 권부의 중심이었다. 육조대로 끝에는 황토현이라는 붉은 언덕이 있었다. 황토현 붉은 언덕 즈음, 지금의 이순신장군 동상부근에서 경복궁과 백악산을 바라다 보면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전통도시 한양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여름에 그린 그림

이 모습을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이 그림으로 남겼다. 백악춘효(白岳春曉)이다. 어느 봄날의 새벽 백악산,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나라잃어 주인 없는 궁궐, 경복궁이 뭔가 허전하다. 수천 명에 달하는 구중궁궐속 인적은 보이지 않고 새벽 어스름한 궁궐의 쓸쓸함이 가슴을 져민다. 백악춘효는 두 장으로 전해진다. 1915년 봄 경복궁과 백악산의 모습을 여름과 가을에 그렸다. 그런데 두 그림을 비교하면 가을의 그림에 해태상이 없다. 왜 일까? 1915년 9월부터 치루어진 ‘시정5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행사 때문이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하고 5년이 지난 후 일제 통치로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경복궁 드넓은 지역에 구중구궐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고 전람회를 열었다. 전형적인 전시 행정이다. 이 때 동원된 사람만 1백2십만 명이 넘었다. 수많은 인파가 넘쳐나는 행사였는데 궁궐의 대부분이 이때 헐리고 경매로 팔려나갔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가을에 그린 그림

궁궐이 헐려나갈 때 경복궁을 지키던 양옆의 해태 상 하나도 사라졌다. 심전 안중식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으로 장승업에게 수학한분이다. 민족의식이 투철해 3.1운동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타계했다. 자신의 호 심전(心田)중 心자와 田자를 아끼는 제자에게 떼어 주었다.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1918~1972)과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1899∼1978)이다. 이상범도 그의 스승 안중식을 닮았을까? 동아일보 재직시절인 1936년에 치루어진 베를린 올림픽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킨 주범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나중에 친일의 흔적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 때는 손기정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 조선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가 동아일보에 재직하고 있을 때 사회부장이 소설가 현진건이다. 월북한. 화가 정현웅이 그의 미술팀원이었다.

동아일보자리에 있던 명월관


황토현의 끝자락에 위치한 동아일보가 지어지기 전 이곳에는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기생집이 있었다. 명월관(明月館).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을것이다. 당시의 기생은 시서화에 능해, 사대부들과 대화가 통하는 예인이었다. 지금의 연예인이라고 할까? 그들은 노래와 춤, 그림과 글씨 못하는 것이 없는 문화인이었다. 그중에 난을 제일 잘치는 기생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주산월(주옥경)의 대나무 그림

산월이.1914년 5월16일자 매일신보에는 그녀의 얘기가 나온다. "그림도 잘 그리고 가무에도 칭찬 듣는 주산월" 그녀는 나중에 33인의 대표격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세 번째 아내가 된다. 3.1운동으로 남편이 옥에 갖혔을 때 끝까지 지킨분이다. 명월관에는 이처럼 유능한 예인들이 많았다. 명월관이 유명한 것은 비단 이름 있는 기생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이 집의 요리가 최고였다. 궁궐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내왔다. 그 이유는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 때문이다. 순흥 안씨. 안중근도 순흥 안씨이다. 그러고보니 백악춘효를 그린 사람도 순흥 안씨 안중식이고, 명월관의 주인도 순흥 안씨인 죽농 안순환( 竹儂 安淳煥,1871~1942)이다. 안중근도 순흥안씨이다. 조금씩 그들의 삶이 비슷하다. 안순환은 어떻게 궁중요리를 일반인들에게 접하게 했을까?



.안순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경하여 머슴으로, 음식점 조수로 일하다 궁궐에 들어간다. 궁궐에서 마침내 대령숙수가 되었다. 대령숙수(待令熟手)는 전문적인 남성 주방장 숙수(熟手) 중에서도 능숙한 궁중 주방장을 말한다. 왕이 베프는 궁중의 큰 잔치를 도맡아 했다. 그는 왕의 잔치를 관리하는 전선사(典膳司)의 최고책임자 장선(掌膳)까지 올라 궁궐 내외 소주방의 주방 상궁, 대령숙수를 관리했다. 그가 궁궐 재직중 1903년 황토현에 명월관을 차렸다고 하니 당시로서 투 잡을 한 셈이다. 안순환은 1910년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는 정3품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관립극장 원각사도 인수해 운영했다고 하니 사업가적인 기질은 타고 낫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가 망하자 궁궐에서 일을 하던 오갈데 없는 관기들과 궁중 나인들이 명월관으로 몰려왔다. 기생들은 거문고를 타고 난을 치며 궁궐에서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나인들은 궁중에서 했던 비법으로 약주, 소주를 만들어 손님상을 풍성하게 했다. 대령숙수 출신 안순환의 지휘로 궁궐에서 먹던 편육, 12첩 반상 들을 상품화시켰다. 왕이 먹던 음식을 일반인들이 접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이었다. 명월관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1903년 개업한 명월관은 1906년 확장공사를 했다. 3층으로 지어 연건평이 300평에 스무 개의 별실이 있었다. 나라가 격변하던 시기에 비밀스런 회합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중국인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식당들이 속속 들어와 진고개와 종로에서 개업을 했지만 입맛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명월관의 음식은 임금이 먹던 것이라히지 않는가. 1919년 명월관이 불에 타 없어지기까지 장안의 내로라하는 손님들이 차고 넘쳤다. 왕이 먹던 음식을 구경이라도 해야 대화에 끼어들을 수 있었다. 명월관에 최고의 요리로는 '교자상 요리였다. 원래 '교자(交子)'란 궁중연회가 끝난 후에 임금이 민간에 하사하는 음식을 말한다. 상이 내려지면 연회에 참가한 스텝 여러 명이 둘러앉아 함께 먹던 것인데 안순환은 이 음식을 새롭게 개발하여 4인이 둘러 앉아 먹는 것으로 변형시켰다. 지금도 교자상이라고 하여 한정식 요리집과 일반 가정에 한 두 개씩 비치되어있다. 그 명월관이 불에 타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동아일보이다. 안중식의 백악춘효는 새가 높이 올라서 보는 시각, 즉 부감법으로 그렸다. 아마도 지금 동아일보 옥상에서 보면 그림의 화각이 잡힐 것이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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