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가여운 것들'의 벨라
성숙한 몸에 깃든 아이의 마음을 지닌 여성. 모든 남성이 바라는 여성상이 아닐까요? 마릴린 먼로가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남자들은 환호했습니다. 굴곡 있는 몸매와 순진무구한 표정의 대비가 빚어내는 신선함 덕분이었죠. 영화 ‘가여운 것들’에 등장하는 벨라(엠마 스톤 粉)는 이제 막 태어났습니다. 성인 여성의 몸을 타고났다는 사실만이 다른 신생아와 다릅니다. 갓 세상에 나온 벨라에게 모든 사물과 사람은 낯설고도 경이롭습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법입니다. 그들과 함께 할 때, 익숙한 일은 낯선 경험으로 바뀌고 무료한 일상은 즐거운 유희로 변합니다.
마릴린 먼로가 그랬듯, 벨라는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곧 남자들은 벨라가 그들이 꿈꾸던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벨라는 아이처럼 다루기 쉽고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티 없이 순수하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도덕과 규율, 금기가 통하지 않는 존재가 아이들 아니던가요. 천진함은 무지를, 무지는 잔인함을 낳습니다. 천연덕스럽게 나비의 날개를 잡아 뜯는 아이들의 눈망울에 악의는 없습니다. 벨라는 수술용 메스로 실험대에 놓인 시신을 난도질합니다. 그녀를 향한 남자들의 마음도 산산이 부서집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시 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입니다. 벨라를 창조한 갓윈(Godwin) 박사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혼전 성씨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기워 만든 흉측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칭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괴물의 외피에 머물 뿐입니다. 괴물 역시 인간과 똑같이 느끼고 사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괴물은 자신을 만든 박사에게서조차 버림받는 가여운 신세가 됩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생명이라는 점에서 벨라 역시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벨라에게는 괴물이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괴로워하는 괴물과 달리 그녀는 자의식으로 고통받지 않습니다. 실증적이고 굳건한 마음은 갓윈 박사에게서 물려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벨라는 창조주이자 아버지인 갓윈 박사(윌렘 데포)의 마음마저 사로잡습니다.
벨라는 그 탄생부터 불온합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몸을 물려받았습니다. 벨라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강물에 뛰어들고 맙니다. 갓윈 박사는 빅토리아의 몸을 이용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했습니다. 박사가 벌인 행위는 프랑켄슈타인보다도 엽기적이고 전위적입니다. 빅토리아의 머리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태아의 뇌를 이식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몸을 차지한 자식이라니……. 벨라의 탄생은 어머니의 죽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살부殺父 신화에 등장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거부합니다.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탄생한 벨라는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요. 어머니를 옭아매던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와 도덕은 벨라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성인 여성의 몸을 지니고 태어난 탓일까요? 벨라는 일찌감치 성性에 눈뜹니다.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벨라에게 성욕이란 식욕처럼 자연스러운 욕구에 불과하니까요. 남성의 육체는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장난감일 뿐입니다. 벨라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성을 탐닉합니다. 그녀가 처음 흙과 바람, 햇볕을 느꼈을 때처럼 말이지요.
남자들은 앞다투어 벨라를 소유하려 합니다. 벨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숙녀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회적 방식을 택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건 거침없고, 내숭 따위 모릅니다. 남자들은 제멋대로 욕망을 추구하는 벨라에게 호기심을 느낍니다. 벨라를 길들여 그들이 원하는 여성으로 만들고 싶다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녀를 창조한 갓윈 박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느 부모처럼 벨라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그녀를 붙들려고 하지요. 그러나 벨라에게도 부모 품을 떠날 시간은 찾아옵니다. 벨라는 그녀의 약혼을 공증하러 온 변호사 덩컨과 함께 집을 나섭니다. 덩컨(마크 러팔로)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바람둥이입니다. 꽃을 찾는 나비처럼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옮겨 다니지요. 덩컨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여성을 만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여성을 소유하고픈 딜레마와 맞닥뜨립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넓은 세상으로 나온 벨라의 호기심은 만족을 모릅니다.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하며 인간 세계를 관찰합니다. 곧 벨라는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불평등과 부조리에 눈뜨고 소외된 이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벨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퍼주고 빈털터리 신세가 됩니다. 곧 벨라는 쉽게 돈을 버는 방법에 눈뜹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까지 벌 수 있는 직업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벨라는 매음굴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돈을 버는 행위는 벨라에게 다른 용역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은 세속의 윤리일 뿐입니다.
어느 날, 벨라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의문을 가집니다. 벨라의 배에 남은 수술 자국은 그녀가 태어나며 남긴 흉터였습니다. 기원을 찾아 고행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마침 갓윈 박사는 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한 상황입니다. 벨라는 갓윈 박사가 들려주는 출생의 비밀을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에 드러난 세계관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보여준 암울한 그것과는 다릅니다. 영화 속 세계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닙니다. 과학 기술이 가져올 불길한 예감은 보이지 않으며,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경계는 불명확합니다. 벨라는 자신이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믿습니다. 아버지의 실험 때문에 변형되고 뒤틀린 신체를 갖게 된 갓윈 박사야말로 인조인간일지 모릅니다.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 땅에 나왔건, 슬픔과 기쁨, 연민을 느끼는 모든 존재는 존엄하다고 선언합니다.
벨라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집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남긴 족적이 벨라의 발목을 잡습니다. 빅토리아의 남편이자, 벨라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알피 장군이 등장합니다. 벨라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알피 장군을 따라갑니다. 몸은 어머니에게서 빌렸지만, 벨라의 정신은 온전히 그녀의 것입니다. 유물론자인 갓윈 박사와 벨라에게는 인간의 두뇌야말로 그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빅토리아와 벨라는 순차를 두고 같은 신체를 소유했을 뿐, 엄연히 다른 존재이지요. 이 기묘한 근친상간의 가능성에 관객은 긴장합니다. 그러나 벨라는 곧 빅토리아가 왜 알피를 떠났는지 깨닫습니다. 알피를 제압한 벨라는 그의 두개골에 염소의 뇌를 이식합니다. 어리석고 포악한 알피의 몸에는 새로운 주인이 어울립니다. 굿윈 박사는 평화롭게 숨을 거두고, 염소의 뇌를 가진 알피 장군은 정원에서 풀을 뜯습니다. 그렇게 벨라는 두 명의 아버지를 떠나보냅니다. 이제 벨라에게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부여하는 권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은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이 그레이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요르고스 안티모르 감독을 만난 소설은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영화는 고향을 떠난 주인공이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고 돌아온다는 영웅담의 화법을 따릅니다. 영화는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미장센으로 가득합니다. 카메라는 줄곧 상반된 대상을 교차하며 비춥니다. 벨라가 성장함에 따라 단조로운 흑백화면은 총천연색으로 바뀝니다. 단순하던 벨라의 사고도 점차 복잡하고 정교하게 변화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호텔을 비추던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도시를 비추자 참혹한 빈민촌이 드러납니다. 매음굴에서 일하는 벨라의 아름다운 몸과 그녀를 탐하는 주름지고 비대한 육신이 대비됩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과장되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관객은 꿈결을 헤매는 듯합니다. 영화는 202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과 의상상, 분장상을 휩쓸었습니다.
엠마 스톤은 놀라운 연기력으로 막 걸음마를 익힌 벨라의 어설픈 움직임을 재현합니다. 벨라는 실험실에서 탄생한 첫 인류이자 새로운 이브입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여성이지요. 당대의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자유롭게 성장했기에 그녀는 주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굿윈 박사의 삭막한 실험실은 벨라를 양육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셈입니다. 영화 여기저기 등장하는 파격적 노출과 정사 장면은 딱히 에로틱하지 않습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벨라의 탐구 정신(?)이 느껴질 뿐입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논란의 여지로 가득합니다. 이미 도래한 인공지능의 시대에 생명 공학이 지켜야 할 윤리를 들먹이기란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파리의 유곽에서 일하기로 한 벨라의 결정에 어떤 관객은 거부감을 느낍니다. 성매매 혹은 성노동을 둘러싼 논의는 거대 담론과 맞물려 있으며, 이 지면에서 다룰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벨라가 자유 의지로 선택한 자신의 직업을 존중하고 기꺼워했음은 분명합니다. 순수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에서 ‘가여운 것들’에 연민을 품는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벨라. 벨라는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자 자기부정에서 벗어난 최초의 ‘괴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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