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문화사 ④
돈 냄새라면 일가견이 있는 이종찬 장군의 할아버지, 이하영대감이 원효로에 대륙고무공업(주)를 차린 것은 1919년이다. 자본금 규모 면에서 타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서형(庶兄, 의붓 형) 이윤용(李允用 1854~1939)을 비롯해 500명을 주주로 참여 시켰고 자본금은 50만원(지금돈으로 500억원)이다. 그는 어떻게 대한제국 시절의 대신들을 주주로 참여 시킨 것일까? 어떻게 돈을 벌어 이렇게 큰 회사를 차린 것일까? 이하영 대감의 인생사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단면이다.
이하영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다. 앞서 얘기한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먼 형제관계이다. 이하영은 부산 초량에서 떡 장사를 하다가 큰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일본으로 간다. 그러나 같이 떠난 동업자에게 사기당하여 알거지가 되었다. 겨우 배 삯을 마련하여 돌아오는데, 배 안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후 미 공사관 공사로 활약한 호러스 뉴턴 알렌 ( 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다. 알렌은 조선의 미공사관 소속 의사로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탔다. 두 사람은 1858년생, 동갑내기 ’말띠‘이다.
알렌은 오갈 데 없는 이하영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요리사를 삼았다. 요리만 했을까? 알렌의 입이 되어 주었다. 알렌은 영어를 가르쳤다. 갑신정변 후,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의 신임을 받은 알렌의 천거로 고종의 영어 통역관이 되었다. 이하영이 어떤 영어를 구사했는지, 그가 한 요리를 알렌이 먹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남는다. 궁궐에서 왕을 만나려면 관직이 있어야 했다. 그는 일약 외아문 주사가 되었다. 외교관이 된 것이다. 박정양이 미국의 주미공사로 갈 때인 1886년, 2등서기관이 되어 1등서기관인 이완용, 이상재와 같이 미국에 간다. 일개 떡 장수에 불과했던 사람이 당당히 외교관이 되어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고종은 떠나는 그에게 밀명을 하달한다. 미국에서 부산, 원산. 인천항에 들어올 때 내야 하는 무역 관세 명목으로 200만 불을 빌려, 현지에서 미국군인 20만 명을 대동하고 돌아오라는 황당무계한 밀지였다.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쓴 ’한미 국교와 해아사건“(신민, 1926년 6월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우리나라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생각한 청나라가 발끈한 것이다. 허가 없이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았다. 그래서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간 이상재, 이완용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소환 당한다. 이하영만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졸지에 미국 공사대리가 된다. 뉴욕 은행에서 100만 불을 무역 관세 명목으로 우선 차입했다. 그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실컷 놀았다. 혼자 남은 워싱턴 밤거리에서 밤의 황제로 군림한다. 파티, 연회장, 무도회장에 연일 불려 다녔다. 얼마나 허세를 부리고 돈을 물 쓰듯이 했는지, 미국의 외교가에서 백인 미녀에게 청혼 받을 정도였다.
상투를 튼 머리에 이상한 옷과 수염을 기른 동양의 외교관에게 미국의 미녀들이 정신이 나갔다. ‘상투를 튼 댄디’에게 미국의 외교가는 환호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얼마를 썼나 봤더니 100만 불 중 16만 불을 탕진했다. 이 일을 어찌 해결할까? 고민만 하고 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은행장을 대동한 미국 외교관의 호출이었다. 그는 ’미군을 파견하는 문제를 상원에서 협의했는데 부결되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사용한 16만 불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일이 너무도 잘 풀렸다. 그의 인생역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와 탄탄대로를 걸었다. 한성판윤을 비롯한 중앙 관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04년에는 ‘그 잘하는 영어 실력’으로 외무대신에 올랐다. 합병 후에는 중추원 고문, 일제의 귀족 작위를 받았고 은사금도 두둑이 챙겼다.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그가 얼마나 무식한지 한문으로 된 문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시류를 잘 탔고 배짱이 두둑했다. 그가 원효로에 대륙 고무신을 세운 시기는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다. 자신을 아꼈던 고종의 승하도, 전 민족이 궐기한 3.1운동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시대를 읽어 기업인으로 변신해서 부자가 되었다.
대륙 고무는 1922년 9월 동아일보에 광고를 실었다. “대륙 고무가 제조한 고무화의 출매함이 이왕(李王) 전하께서 이용하심에 황감을 비롯하야...“그의 마케팅 방법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마케팅에 조선의 왕, 순종을 활용한 것이다. 대륙고무에서 만든 ’대장군 고무신‘을 임금이 신고 다닌다는 것이다.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 유명 연예인의 액세사리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순종이 신고 다니는 신발이라니.. 순종, 비운의 왕이 아닌가. 순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마케팅으로 연결되어 대박이 난 것이다. 순종이 출현한 것도 대단하지만 어떤 감언이설로 순종을 고무신 마케팅에 끌어들였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한편 고무신공장을 시작으로 재계 서열 7위까지 올라간 회사가 있다. 서지지 않았다. 이런 노력으로 부산의 국제고무 공장에서는 물건을 받아 가려는 상인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1960년 대형화제로 62명의 여공들이 숨지면서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였다. 운동화 생산에 눈을 돌린다. 60년대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서 운동화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운동화가 국내에서 잘 팔리자, 이번에는 외국 시장에 눈을 돌린다. 정부는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원화가치를 대폭 떨어뜨렸다. 1970년대 미국의 한 마라톤 전문지에서 국제상사의 마라톤화가 최고라는 평가도 받게 된다. 국제그룹이다. 그룹의 총수 양정모는 처음에 고무신공장으로 대박을 터트린 사람이다. 그는 1947년 부친이 운영하던 부산 범일동의 정미소 한쪽에 고무신공장을 차렸다. 그가 만든 브랜드가 ’왕자표 고무신‘이다. 찍어내기만 해도 고무신이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이다. 범표 고무신, 말표 고무신, 기차표 고무신 등등, 49년 부산지역에서는 고무신공장이 79개에 달해 공급 과잉현상이 빚어졌다. 그러나 왕자표고무신은 품질과 신용 면에서 으뜸이었다. ”내가 고무신 한 번 제대로 만들어 볼려고 을매나 노력한 줄로 아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무 배합 장인들을 수소문해서 모셔온 기라“ 고무신은 단일 고무 소재로 만들지만 어떻게 원료를 배합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런 면에서 왕자표 고무신은 찢어지지 않았고 추운겨울에 얼어도 부서지지 않았다.
덕분에 국제화학은 승승장구하여 종합 무역상사로 발전하게 된다, 고무에서 시작한 회사가 상사, 그룹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용산의 사옥은 기하학적 모양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84년도에는 연간 매출액 2조 원에 이르는, 재계 7위의 회사가 된다. 83년도부터 불기 시작한 중고등학교의 교복 자율화로 운동화 수요가 증가하는 것도 회사 매출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재계 7위의 회사는 5공 시절 하루 아침에 해체되었다. 무슨 일인가? 전두환 대통령의 괘씸죄에 걸렸다고 했다. 항간에는 대통령의 재계 총수 회의에 양회장이 지각을 해서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재계 위상에 맞지 않는 정치자금 때문에 벼르던 차에 회의에 늦자 대통령이 그룹을 해체 시켰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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