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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9. 2024

③- 대륙고무신

브랜드의 문화사

반바지의 어린이의 정체?

작년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본부에서 철수한다고 하여 연일 뉴스를 달구었다. 필자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 만큼은 이 일에 결사 반대할 거로 생각했다.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이종찬 광복회장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가운데 반바지의 어린이가 광복회 이종찬회장이다

이 사진은 해방 후 1945년 11월5일,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서 교민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가운데 화환을 두르고 계신 분이 백범 김구 선생이다. 중앙의 반바지 차림으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어린이가 이종찬이다.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종찬의 작은할아버지 성재 이시영 선생(1869~1953)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눈물을 훔치는 것일까? 모두 광복의 기쁨으로 들떠 있는데.. 이 노인은 분명 36년 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라가 빼앗기자, 선대로부터 받은 명동의 그 넓은 땅을 팔아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독립은 요원했다, 땅을 판돈, 40만 원(자금 환산하면 1천억 아니 조가 넘을지도 모른다)은 금세 바닥이 났다. 이후에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풍찬노숙을 하다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만 살아 돌아왔다. 6형제의 실질적 지도자가 넷째 우당 이회영 선생이고, 그의 손자가 전 국정원장, 현 광복회장인 이종찬이다. 그의 일가 친척들이 멀리 중국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치신 분들이다. 그것을 보고 자란 이종찬은 육군본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종찬 장군

우리의 근대사에는 또 다른 이종찬이 있다. 6.25전쟁 중 참모총장으로 활약한, 한문도 똑 같은 李鍾贊 장군이다. 그는 1937년 일본 육사(49기)를 졸업하고 남태평양 야전 부대장으로 근무했다. 일본이 패색이 짙을 때, 뉴기니 전선에서 독립공병 제 15연대장으로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아 이듬해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국했다. 해방 전 고향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 이규원이 1945년 4월 사망하자, 일본 천황에게서 받은 귀족 작위를 습작(襲爵, 일본 귀족의 작위를 물려받음)하겠느냐는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총알받이로 죽어가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습작은 사치였다. 조선인으로서 일본 작위를 받는다는 것에 회의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습작하지 않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해방 후 3년간의 낭인 생활을 하며 자숙 기간을 보냈다. 1948년,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었다. 군부 인사들이 찾아왔다. 뭔가 나라를 위해 해달라는 것이다. 마지못해 대령이 되었다. 1951년 육군참모총장으로 한국전을 지휘했다. 이승만은 피란지 부산에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려 했다. 소위 ’부산 정치파동‘이다. 대통령은 이종찬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의 반대 세력을 체포하라 했다. 그는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가 참 군인으로 추앙받는 이유이다, 이종찬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걸어간 길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친일파 인명사전에도 올라간 사람이다. 이하영(李夏永, 1858~1929). 그는 누구일까?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 말년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무신회사인 대륙고무공업(주)를 창업한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산업에서 고무업계의 비중이 컸다. 고무신 때문이다. 고무신을 신기전에는 너도나도 짚신을 신고 다녔다. 과거를 보러 한양 길에 오른 선비의 괴나리봇짐에는 의례 짚신 너덧 짝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짚신은 너무 빨리 닳았다. 한 사람이 1년에 평균 70개를 신었다. 볏짚으로 만든 탓에 바닥이 울퉁불퉁했다. 비가 오면 물기에 젖어 축축하고 진흙마저 달라붙어서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에 반해 고무신은 일 년 이상 오래 신을 만큼 내구성이 뛰어나고 물이 들어와도 금세 마르는 신비로운 신발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일본의 고무업계는 우리나라에 고무신공장을 세웠다. 1921년부터 1년여간 경성(서울)에서만 고무신 88만 켤레가 팔렸는데 일본 수입품이 70만 켤레, 나머지는 조선 제조품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1일자). 일본이 만든 신발은 호모화라 했다.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다. 그러나 일본의 호모화는 바닥은 고무이지만 신발의 옆은 천이나 가죽을 덧대어 값이 비쌌다. 서민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꿈의 신발이었다.


오늘과 같은 고무신 모양으로 바꿔,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이가 이병두(李丙斗)이다. 그는 고무의 편리성에 착안하여 일본의 호모화의 문제점과 원인을 파악했다. 남자 고무신은 전통적인 짚신 모양을 본떠 볼을 크게 하였고 발등을 드러낸 모양으로 만들었다. 여자 고무신은 앞머리가 볼록하게 솟아오른 코신을 본떠, 양반 여인네의 가죽신 모양으로 만들었다. 신발의 모든 소재를 고무로 단일화시켜 생산하니, 단가가 확 낮추어져 경쟁력이 생겼다. 짚신이 10전일 때 고무신은 40전이었다. 짚신은 3.4일이면 떨어져 쓸 수 없지만 고무신의 내구성은 오래갔다. 짚신보다 가격이 4배나 비싸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훨씬 이익이었다. 비가 와도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벗겨지기 쉽고 내한성이 없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은 짚신도 마찬가지였다. 비싼 가죽신이 아닌 이상 고무신을 능가할 신발은 없었다. 웬만한 부자나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면, 대부분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그래서 고무신의 신발 점유율이 85%를 차지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검정 고무신, 고무신으로 귀천이 없어졌다. 원래 고무의 색깔은 옅은 갈색인데, 고무를 재생하여 검은색이 된 것이라서 대부분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의 대중성으로 선거 유세장에서는 돈 봉투처럼 통했다. 아이들은 이것을 자동차를 만들며 놀았고, 물가에서는 송사리를 잡아 고무신을 어항처럼 사용했다. 고무신이 닳아 찢어지면 어머니들은 실로 꿰매 신도록 했지만, 아이들은 빨리 닳게 하여 엿을 바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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