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타 김 인터뷰 ③]
'천경자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 서울 역삼동 맨션나인서 개인전 개최
-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던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또 '길례 언니풍'의 여인상의 주 모델이 수미타 교수님이라고들 하는데 추억이 담긴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가 쓴 책 『천경자 코드』 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요. 지금 생각나는 건 1977년 여름, 언니가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 서교동 단독주택에서 어머니, 외할머니, 언니, 오빠, 남동생, 일하는 언니 봉순이, 흰 강아지 꽃순이와 저까지 여덞 식구가 함께 살 때예요. 어머니는 작품을 그리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실 때 온 식구를 2층에 있는 화실로 부르곤 하셨죠.
외할머니가 몸이 무거우셨기 때문에 저희가 할머니 엉덩이를 떠받쳐 밀면서 2층으로 올라갔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어머니는 모두를 불러 모으신 후 식구들의 그림 평 듣는 걸 즐기셨어요. 어떤 날엔 잡지 표지로 발표할 그림을 두고, 한 사람씩 종이 쪽지에 동그라미 아니면 가위 표를 하게 하셨죠. 당연히 모두 동그라미를 쳤어요. 단 한 분만 제외하고요. 외할머니는 동그라미를 치지 않으시고 쪽지에 연필로 ‘힛또’라고 적으셨어요. 히트할 거라는 거죠. (웃음) 그렇게 저는 어머니는 물론 어머니의 작품과도 밀접하게 살았죠.
'길례 언니풍'은 물론 제 어머니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은 해외 스케치 빼고 모두 저라고 보시면 돼요. 4~5살 때부터 어머니 그림 모델을 해드렸죠. 모델을 하던 순간도 생각나요. 한 5분 정도 되면 몸이 떨리죠. 같은 동작을 유지하는 일이 힘들거든요. 어머니는 삽화 그릴 때도 언니, 오빠들 모두 포즈를 시켜서 일일이 다 스케치하셨죠. 그러나 불평한 자식은 없었어요.
저를 그릴 때의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그림 속 여성의 머리 스타일을 보면 알아요. 어머니가 77년도 즈음에 그리신 테레사 수녀 같은 작품의 여성들도 다 제가 모델이죠. 제가 없을 땐 어머니가 제 얼굴 스케치를 보고 그리셨기 때문에 어머니 작품이 똑같은 형태인 것이 없어요. 같은 스케치를 그렸더라도 조금씩 그 비율이 달라지거든요. 그러니까 만약 어떤 작품이 어머니의 또 다른 작품과 완전히 비율이 똑같다면 그건 베낀 거죠.
- 작가님은 박경리 선생과도 많은 교류가 있으셨죠. 관련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파시』라는 장편 소설 작품을 어릴 때 참 좋아했어요. ('파시'는 어장을 뜻하는 말로, 소설은 6·25 전쟁 후 통영을 배경으로 한다.) 여주인공들의 얼굴을 상상해서 공책에 그려보기도 했죠. 선생님이 쓰신 편지도 제가 가지고 있어요. 편지 내용이 너무 애처로운 게, 아마 정릉에 사실 때 아직 「김약국의 딸들」을 내기 이전 형편이 어려울 때인 것 같아요. 박경리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오고 싶었는데, 버스비가 없어서 못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죠.
당시 작가들은 삽화를 그려야만 연명할 수 있던 때였어요. 그런데 마침 이번에 어머니가 그리신 <파시> 관련된 삽화를 몇 개 발견했어요. 이번 고흥에서 열릴 전시를 위해 세 점을 빌릴 수가 있게 되었죠. 당시엔 신문사에서 다 나눠 가지고 그랬던 때였잖아요. 어머니가 저를 모델로 하셨는지 언니를 모델로 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삽화뿐만 아니라 그 삽화가 실렸던 그날 신문도 찾게 되었죠. 이번에 고흥에서 열릴 100주년 전시의 한 파트에서 이 내용을 다룰 예정이에요.
"어머니는 화가보다는 여류 문인들과 친했다. 그중 아주 도타운 친분을 나눈 분은 박경리 선생님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경상도 억양에 목소리도 맑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고왔고 얌전하면서 여성적인 향기가 있었다. 앉아 있을 땐 항상 다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나란히 모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내가 방 안에 들어가면 손짓으로 불러 핸드백을 똑딱 하고 열어 돈을 주곤 했다."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미소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슬퍼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어요. 강하면서도 약하고 얕으면서도 높은 처세를 못 하고 생활인으로 영 모자라면서 선생님은 그 진실 때문에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누가 선생님을 아실까요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작품 거만스럽게도 나는 내가 알며는 남이 모를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건방지죠? 그것은 일종의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속인들의 피면적 견해가 싫어서 그래요. 역시 건방진 얘기죠. 한번 선생님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차비가 없어서 그만두었어요. 아 참 저 머리 짤랐습니다. 면도칼로 지가 짤랐어요. 미장원에 가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유쾌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찌꺼렸군요…”
-박경리 선생의 친필 편지 일부 내용-
- 올해는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천경자 화백에 대한 연구가 깊이 있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은 상황에 대해 유감을 표하셨는데요. 그렇다면 한국 미술계에서 천경자 화백의 어떠한 점이 더 연구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더불어 고흥에서 열릴 천경자 화백 100주년 관련 전시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에 연구가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서울시에서 어머니의 미술 작품 저작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학생들 아니면 학위를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저작권료를 많이 내기가 어렵다는 점도 있는 것 같고, 또 하나는 좀 잘못된 인식도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 인생이 얼마나 많은 굴곡과 투쟁의 연속이었는지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어머니의 화려한 그림과 비싼 그림 값만 부각되는 점이 참 안타까워요. 어머니가 부르주아적 삶을 사셨다고 보이는 측면요. 어머니는 배고플 때를 제외하고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파신 적이 없어요. 그림을 다 기증하시기도 했고요. 그런 점들이 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에 역경을 견딘 세계의 유명 여성 화가들에 대해 한국인이 쓰신 책을 본 적이 있어요. 거기에 야요이 쿠사마나 프리다 칼로 같은 모두가 아는 분들이 등장하는데,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어머니를 넣으셨더라고요. 저는 그분의 눈이 정확하다고 봐요. 그 정도로 어머니가 창의적인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고흥에서 어머니 100주년 전시를 총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유품을 기증한다는 양해 각서를 쓰러 갔던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얘기가 되어서 맡게 되었어요. 감사하게도 관계자가 제가 어머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점, 현재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는 점을 인정해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어머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기회인 만큼 알차고 감동이 있는 전시를 기획하겠다는 야심이 생겼습니다.
이번 고흥 행사에서는 어머니에 관련된 심포지엄을, 말하자면 어머니의 고흥, 광주 시절 이야기 같은 것들을 짧게 발표하고 대화하는 형식의 간담회 같은 걸 열고 싶어요. 고흥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작품 세계가 있을 수 없기도 하고요. 전시 구성도 평범하게 연대순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코너마다 주제를 정해서 스토리를 풀어가는 형식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아까 언급했던 어머니와 박경리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편지, 삽화, 신문들을 한 주제로 묶어 입체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전달하는 식으로 말이죠. 이런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그 시대상과 작가에 대한 이해를 의미 있게 알리고 싶어요.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부딪쳐 볼 생각입니다.
- 이번 전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내 존재의 뿌리를 찾는다는 건 정말 하나의 긴 여정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의 뿌리, 즉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춘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말 그대로 진짜 여정이에요. 내가 오늘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내일 갑자기 내 정체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죠. 실수하더라도 그날 그날에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게 자리 잡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지금 이 나이에 이제 겨우 좀 찾았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조바심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자기답게 사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얘기하시겠지만, 그냥 젊은 분들이 어떤 선택을 할 때 이게 가장 나다운 선택인지 한 번쯤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그렇게 선택한 후 실패했다 해도,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언젠가 큰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어요. 제가 살아온 인생을 보니까 그랬어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헛된 게 하나도 없다고 봐요.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서 나에게 자양분이 돼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