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장인을 만나다 ⓛ]
- 대각국사의 가사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클리브랜드박물관에서 티벳의 스님들이 입는 가사를 복원해 보겠느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김영숙 선생님의 조언을 받아 가며 외국 스님들이 입는 티벳 가사를 마침내 복원했습니다. 그것을 잘 만들어 주니 박물관에서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군 제대후 명주실 공방을 열어 실을 납품하는 수준에서 8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홍염에 매진하면서 얻은 결실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김영숙 선생을 만나기 전에도 붉은색 가사인 '구조 가사'를 만들기도 했었습니다만 이렇게 외국에서도 인정을 해 주니 감사하기도 하고 기분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스님들이 입는 가사는 시장에서 명주실로 만든 천을 사다가 가사를 만드는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홍화꽃으로 염색해서 만든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가사의 홍염과 왕의 홍염은 모두 같은 색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각국사가 입는 가사를 홍염으로 만들기로 작정했는데 시간이 5년이나 걸렸습니다. 만드는 과정보다 스님들이 저에게 일을 맡기지 않아 설득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 것이죠. 선암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홍염 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와서 재현한다며 이리저리 가지고다녀 오히려 원본 가사를 많이 훼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선뜻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이죠.
내가 다시 가사 만드는 일에 도전하자 선암사에서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3직회의'까지 하면서 어떻게 할까 고심했다고 합니다. 5년을 방문해 설득 끝에 큰 스님에게 홍염으로 만든 제대로 된 가사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큰 스님인 '지허' 스님이 결국 나를 믿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대단한 학승입니다. 이미 나는 수많은 복원 작업을 했기 때문에 복원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가사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갖다 드렸는데 스님이 내 앞에서 황송하게 저의 여러 이야기들을 메모까지 했습니다. 저의 실력을 인정해 주신 것이죠. 그 인연으로 큰 스님과 계속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나에게 마시는 차도 많이 보내주신 분입니다. 당시에 저는 너무 젊어 어려워했는데 좋게 봐 주셨습니다. 나에게 선 시집도 주신 스님입니다.
-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199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입니다. 문화재보전협회에서 클리브랜드에서 발주한 제품은 외국 제품을 재현한 것이니 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홍염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전 《전승공예대전》에 홍염을 출품했는데 답장이 왔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며 기계가 일정한 패턴으로 작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제품이 기계처럼 정교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내가 보낸 여섯 필의 홍염 천 중에서 세 필을 돌려보냈습니다. 우스운 일이 벌어진 것이죠. 다 제가 만든 것인데 돌려주려면 다 돌려주던가 해야 하는데... 저의 실력을 인정해 준 것으로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 살아 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상》에서 2008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저의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던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2013년에 《명장》 칭호를 받았고 2017년에 《무형문화재》가 되었습니다. 명장은 대통령에게 받는 가장 큰 칭호입니다.
- 홍염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선시대 여러 왕들의 의궤를 복원할 때, 붉은색 홍염 부분은 내가 담당해서 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 번은 중국의 남경학원에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홍염 전문가를 물어물어 찾아와서 저에게 홍염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강의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이 문화재를 제대로 전승하는 것 같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그것들을 복원하기 위해서 소수민족에게 홍염이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없다고 해서 저에게 온 것이지요.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야마가다현에서 일을 봐주는 사람이 저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과에 연락해서 번호를 찾아 전화가 온 것인데, 왜 만나자고 하는지 공문을 보내라 했더니 정말 공문 원본과 해석본을 보내 간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라 하니까 당시 살던 원서동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때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국가 대 국가의 대표로 만나는 자리여서... 내 인생에서 일본 사람을 만나 홍염을 만드는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삼 남매를 불러놓고 이런 일이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일러두고 그들을 만났습니다.
일본은 홍화 재배를 관장하는 '홍화의 재배 농업 부분'과 그것으로 염색하는 '홍염 부분'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야마가다현은 현의 대표적인 꽃인 '현화'도 '홍화 꽃'입니다. 과거에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홍염 비법을 전수해 갔는데 이제 다시 그들은 우리나라의 홍염의 현황, 홍염의 역사와 전승 상황을 알아보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제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더라고요. 저의 기술이 이제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문화에 우리의 홍염 부분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저는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야마가다현에는 홍염전시관까지 있습니다. 그곳에는 엄청난 자료가 모아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 앞으로의 바람은 무엇인가요?
저는 우리의 홍염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준비하고 있지만 우리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이 깨고 후학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장인의 공방에서 나오자 헌법재판소 경내의 백송이 보였다. 현존하는 백송 중 가장 아름답다는 백송이다. 백송은 어릴 때는 녹색을 띈 볼품없는 나무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나무 줄기가 녹색 껍질을 벗고 흰색을 띄며 아름답게 변해 가는 아주 희귀한 소나무이다. 중국의 베이징이 원산이라서 국내의 환경에서 자라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 자란 대부분의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헌법재판소의 백송도 천연기념물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8호인 '서울 재동의 백송(헌법재판소백송)'과 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49호 김경열 장인은 닮은 점이 많다. 어릴 적의 고난을 겪고 난 뒤, 시간의 흐름 속에 더 단단해지고 귀해졌다는 것이다. 나라의 왕이 입던 곤룡포를 지었던 조선시대의 홍염장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일본의 야마가타현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때, 3남매를 불러놓고 의미를 설명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시켰다는 김경열 장인의 말이 생각이 났다. 장인의 길은 고독하면서도 자랑스러운 길이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이 분들을 '국가 무형 유산'으로 분류한다. 장인이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더 많이 복원해서 홍염이 세계 문화 속에서 더욱 인정 받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