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해외 미술관을 가다 1)
데일리아트 창간 기획, <해외 미술관을 가다> 시리즈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유명 갤러리들을 탐방하는 기획입니다. 뉴욕, 일본 등 해외 화제의 미술관을 기자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탐방물입니다. 그 첫번째 순서로 뉴욕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최영식 미술에디터는 어떤 시선으로 뉴욕을 다녀왔을까요? 그 두번째 이야기를 싣습니다.
- 편집자 주
신을 만나러 왔는데, 신은 안 보이고 인간이 보인다. 그림은 분명 종교화인데, 신의 구원과 자비 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집단성의 매개체가 두드러진다.
Fra Filippo Lippi의(1406-1469)의 ‘Saint Lawrence Enthroned with Saints and Donors’(1440)을 보자.
제목처럼 그림은 성 로렌스와 성자, 그리고 세명의 기부자들을 그리고 있다. 당시 종교화에는 그림제작을 의뢰한 사람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기부자의 구복(求福)을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림은 피렌체의 상인이자 시민정부의 일원이었던 알렉산드리(Alessandri, 1391-1460)가 자신의 가족 교회 제단화로 의뢰한 것이다.
왼쪽의 무릎 꿇은 두 아들과 오른쪽 알렉산드리 본인의 얼굴 자세히 그렸다. 성 로렌스와 함께 있는 성자들 역시 메디치 가문과 연관 있는 코스마스와 데미안 성인이다. 그런데 왜 메디치가를 상징한 그림에서 신이 보이지 않고 인간이 보일까?
작품의 내용 뿐 아니라 재료에서도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Tempera on wood, gold ground’라 작품의 재료가 씌어 있다. 수용성 바인더 매체(통상 달걀 노른자)와 템페라(tempera)는 유럽 중세 및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패널 그림 매체였다. 그런 점에서 1440년 작품에 템페라를 사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템페라와 함께 금박이 재료이자 중요한 주제가 된다. 금! 금이다. 요즘처럼 금값이 사상최고치를 경신하는 시대에 그림보다는 금박액자에 먼저 눈이 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속물의 한계일까? 금은 그 자체로서는 활용성이 한없이 0에 가깝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금에 사람들은 왜 그리 집착하는가?
금이 가치를 갖는 것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집단적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최고치를 보여준다. 스테디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종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한다. 반면에 돈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창조한 신뢰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돈이다' 라고 말한다.
구원의 믿음을 표현하는 종교화조차도 돈이라는 인간 욕망의 정점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구원이 인간의 욕망을 통해 더 뚜렷해진다고 주장한다. 종교화로 감상하던 작품을 Look Again하게 만든 것이 돈이라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감성적 통합을 돈을 통해 봤다면 바로 옆에 있는 비아지오 디 안토니오(Biagio d’Antonio,1472-1516)의 Jacopo di Arcangelo(1441/42-1493) 그림도 집단적 통합을 떠올리는 작품이다.
이 두 그림은 고대 그리스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네 신화가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그림을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그림으로 표현된 언어이자 문자'로 이해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전설, 신화를 당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런 허구의 전달을 통해 인간은 개인의 상상력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유연하게 협력하는 능력을 갖는다.
신화와 종교, 그리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돈과 언어(그림)는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체이자, 근원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규범과 가치체계를 형성한다. 종교화와 신화그림을 통해서 신에 의해 통치되는 중세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이 만든 질서와 규범을 토대로 변화하는 사회를 느끼게 한다. 시대가 변화해 가는 것이다.
500년전 Fra Filippo Lippi와 Biagio d’Antonio가 21세기 본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예술은 오늘의 삶을 지향하고 있고 해석도 오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Again의 과정이 될 것이다. 신의 그림에서 인간을 찾아봤으니, 인간 그 자체로 더 들어가보자.
17세기 바로크회화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Rubens, Helena, and Their Son Frans(1623) 작품이다.
'루벤스가 사랑한 젊은 아내 헬레나와 어린 아들과 함께 저택의 정원에서 산책하는 가족의 평화로운 그림이다'라고 감상평을 써야 하는데 그림이 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하기 보다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루벤스의 아들 목에 줄이 보인다. 2023년 합계출산율 0.73명의 대한민국에서 어린아이에게 목에 줄을 채운다?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2024년 한국인의 시각에서 루벤스와 그의 아내는 희대의 아동학대범으로 지탄받아야 한다. 화가이자 인문학자이며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의 펠리페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1세에게 기사칭호를 부여 받은 외교관인 루벤스가 아들에게 목줄을 채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1623년 당시 사람들도 우리처럼 생각했을까? 당시 사람들에게 성인이 아닌 아이는 본능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돌봄’보다는 본능을 제어하도록 하는 통제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루벤스 그림의 목줄은 실질적 물체이면서 통제를 의미하는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y)로 당시 사람들의 갖고 있던 아이의 의미를 보여준다.
앞서 살펴본 종교화에 깃든 인간의 삶과 욕망처럼 아동 역시 각 시대(과거와 현재의 다른 시대가 아니라 모두 각각의 현재였던 시대)마다 의미하는 바가 달라진다. 아동은 근대 이전에는 개별적 특성을 가진 독립체가 아니라 통솔과 훈육의 집단적 대상으로 여겨졌다. 20세기 이후 비로소 집단으로서의 아동이 아니라, 연령으로 구분되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교육의 세분화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집단이 아닌 아동 개개인의 구별된 아이덴터티를 이룰 수 있었다.
16세기 최고지성 루벤스는 집단적 훈육의 대상 중 한명인 아들에게 끈을 묶을 수 있었지만, 21세기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들 한명 한명에서 차별화된 개별적 아이덴터티를 찾고 있다. 루벤스의 화목한(?) 가정 그림은 본의 아니게 아동에 대한 Look Again의 좋은 사례가 된다.
500년전 그림에서 시작한 인간의 집단적 상상력과 합의, 교육의 변화하는 의미를 살펴봤다. 그 순서의 마지막으로 18세기 프랑스의 초상화 한 점을 감상해보자.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프랑스혁명의 전폭적 지지자로 현실정치에도 참여했던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 ‘라부아지에부부 초상화’(1788)다.
라브아지에(Antiine-Laurent de Lavoisier, 1743-1794)는 연소 시 산소의 역할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질량불변의 법칙은 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아내이자 실험실 조교인 매리(Marie-Anne Paulze Lavoisier) 역시 유명한 화학자였다. 세련되면서도 단순한 복장을 한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부부의 모습을 담은 이 초상화는 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커플을 선보인다. 프랑스혁명 전후, 이성에 대한 찬사와 과학을 통한 진보에 대한 믿음이 부부의 초상화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진 후 프랑스혁명 진행중에 라부아지에는 처형되고, 그 과정에 다비드가 개입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남편 라부아지에일까? 남편 라부아지에는 아내를 옆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 시선(視線, look)을 받은 아내 매리는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凝視, gaze)하고 있다. 매리의 시각은 주체의 시각인 응시다.
중심에 두고 책상 위와 아래에 무게를 재는 유디어미터(eudiometer: 기체혼합물의 양의 변화나 반응을 측정하는 장치)가 있고 유디어미터 장치 옆에는 가조미터(gasometer: 가스의 부피를 측정하는 장치)가 그려져 있다. 과학기재의 활용주체는 응시를 하는 매리다.
다비드의 이 그림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위대한 과학자를 그린 거의 유일한 그림이자, 그림의 주인공이 여성과학자라는 점에서 근대 이성의 정점인 과학에 대한 예찬이자, 남녀의 사회적 관계변화까지 아우르고 있다. 흔히 ‘진-선-미’라는 용어를 통해 미(예술)보다 진(사실, 이성)을 상위에 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식에서 과학(眞이라 여겨지는)과 다르며 과학적 진실, 고정된 불변의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과학자의 진(眞)은 다비드의 미(美)를 통해 재해석되며, 다양한 심미적 의미를 통해 당시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다시(Again) 현재를 살게 한다.
짧게나마 지금까지 MET의 "Look Again: European Painting 1300-1800"를 즐겨봤다. MET가 왜 지금 Again이라는 주제를 던져주는지 몇 개의 작품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현실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1300년에서 1800년사이에 그려진 회화들은 당시 그려진 것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새로 의미를 생성하는 존재로 변화하고 있다. 중세-근대를 지배한 기독교신앙에서 신이라는 완성되고 고정된 존재와 그 완성된 세계를 구원의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 우리가 감상했던 그림들이었다.
당시는 완전하고 고정된 세계를 그린 그림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생성하는 변화와 공통점을 읽게 된다. 루벤스의 그림에서 '어린이'라는 단어가 갖는 변화된 의미를 발견하고, 1511년 Jean Bellegambe 와 1946년 Max Beckmann 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선 동일한 희구를 찾아낸다. Fra Filippo Lippi의(1406-1469)의 ‘Saint Lawrence Enthroned with Saints and Donors’(1440)를 통해 15세기 사람들과 지금 우리가 공유하는 허구에 대한 집단적 상상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은 자연과학이 품고 있는 합목적성과는 다른, 인간이 주관적으로 부여한 합목적성의 결과물인 예술을 지금 여기 우리가 다시 보는 이유가 될 것이다.
AI가 인간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 시대에, MET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위대한 예술작품을 통해서 ‘다시’ 질문하고 있다.
DAILY ART의 첫 여행을 한국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뉴욕의 MET로 시작했다. 두번째 여행은 한국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미술관에 찾아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