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주체의 몸부림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목마름은 시적 주체를 이성적으로 고상하게 행동하게 하지 않는다."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의 표지.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 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전문.
쓰고, 마시기
1연부터 시작된 시적 주체의 발화는 19행이나 이어져, 2연의 마지막 행인 ‘쓴다.’에서 끝난다. 이 발화를 따라가다 보면 숨이 찬다. 물론 “민주주의여”와 같은 단락에서 잠시 쉴 수 있지만, 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을수록 이 발화는 거친 숨을 내쉬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감각을 느끼면서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할 것만 같다. 이는 시적 주체의 발화 방식이 그랬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는 “타는 목마름”을 느끼고 있다. “발자욱 소리, 호루라기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를 피해 어느 “뒷골목”으로 달려와 헐떡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는 것조차 괴로워한다. 하지만 시적 주체는 19행에 걸쳐진 긴 문장을 말하며 ‘최후의 말’을 내뱉는다. 이 발화가 끝나면 더 이상 목이 막혀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최후의 말은 유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살려 달라는 몸부림이다. ‘제발 한 방울이라도 좋으니 물 좀 달라’는 몸부림이다. 그러니까 시적 주체의 2연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문장은 자신을 살려달라는 절박한 구조 신호다. 그는 당장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슴팍에 밀어넣지 않으면 말라 죽을 것 같으니 어서 민주주의를 가져오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래서 시를 보면 1, 2연에 비해 3연은 지나치게 짧다. 이는 최후의 말을 힘겹게 끝낸 시적 주체의 탈수 증세를 나타낸다.
이러한 시적 주체의 몸부림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목마름은 시적 주체를 이성적으로 고상하게 행동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육체는 본능을 따라 움직인다. 1연의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라고 하지만,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라 서술된 본능의 갈망은 시적 주체를 움직이게 한다.
시적 주체는 그곳이 비명과 신음과 통곡 소리로 뒤범벅이 된 장소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당장 “타는 목마름”으로 죽거나 자신이 비명 소리의 주인공이 되거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 주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해 민주주의를 찾는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민주주의를 힘차게 불러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적 주체 곁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그의 갈증을 해소해 줄 자유가 없다. 비명과 피 묻은 얼굴뿐이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써본다. 마치 고기가 먹고 싶어 고기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물론 이러한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는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 심지어 분필은 금방 지워지고 말 것이다.
이때 시적 주체는 뜻밖의 경험을 한다. 한번 상상해 보자. 방금까지 긴 문장을 쏟아내며 흐느꼈던 시적 주체가 볼펜도 아닌, ‘분필’을 들어 목판에 민주주의를 쓴다. 분필에서는 분필 가루가 흩날리고, 시적 주체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흩날리는 분필 가루를 마신다. 그의 콧구멍으로, 가슴팍으로 따가운 분필 가루가 비집고 들어간다. 그는 괴로워하며 콧물을 쏟아내고 연신 기침을 토해내지만, 곧 깨닫는다. 자신이 비록 꿈꾸던, 갈증을 해소해 줄 만큼의 생생한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무엇인가 자신에게로 들어왔다는 것을.
시적 주체는 분필 가루를 마시며 조금이나마 갈증에서 벗어난다. 금방 다시 타는 목마름을 느낄 테지만, 그럼에도 한 마디 더 외칠 수 있다. 이제는 더 큰 목소리로. 이제는 더 선명한 목소리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외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주체의 ‘쓰고, 마시기’의 과정은 시인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흩날리는 분필 가루를 마시며 다시 한 마디를 쓰다 보면 언젠가 그토록 염원하던 대상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詩 다시 읽기] 우리가 목청껏 불렀던 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 < 청년문화 < 영아트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